|
(44)속계와 법계, 야누스의 두 얼굴/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바에서 어떻게 무장무애를 얻나
원효 <화엄경소서>의 첫 부분을 보겠습니다.
(1) “대저 무장무애(無障無石疑)한 법계의 법문을 확인해보니, 법이 아니면서 법 아님이 없다. 그래서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멈추는 .. |
|
[2005-05-18] |
|
|
|
|
(43)원효의 <진역 화엄경소(晉譯 華嚴經疏) 서(序)>/한국학중앙연구원 |
|
무장무애한 법계의 법문 어디 있는가?
원효의 스타일은, 그의 삶처럼, 좀 파격적인 데가 있습니다. 가령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소와, 당대 최고라는 현수 법장의 주석을 비교해 보십시오. 법장이 해당 경전의 의미를 풀이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원효는 거 .. |
|
[2005-05-04] |
|
|
|
|
(41)쉬어 가는 이야기/한국학중앙연구원 |
|
폐허 그대로 두고 새 가람 지으면 어떨까
기이한 일입니다. 원고 파일이 사라졌습니다. 전날 한 작업을 편집부에 보내고, 몇 군데 손을 보려고 오늘 아침 파일을 열어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 초안 시작할 때의 것이 화면에 뜨는 것이 아닙니까. 이 황당한 .. |
|
[2005-04-20] |
|
|
|
|
(40)-여래의 신상(身相)은 신상이 아니다 |
|
원효가 낙산사서 관음보살 만난 이야기
강의를 듣던 외국인 학생들이 묻습니다. “원효 스님은 한국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불교학자요, 실천가라면서요. 그런데 왜 관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하셨나요?”
원효의 생애나 일화는 손에 꼽을 만치 적습니다. 그나마 그 가 .. |
|
[2005-04-13] |
|
|
|
|
(39)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한국학중앙연구원 |
|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미지와 환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환상의 세계 안에, ‘너와 내’가 있고, ‘옳고 그름’이 있으며, 마침내 ‘있고 없음’의 분별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중언부언 주절주절 읊고 더듬어 .. |
|
[2005-04-06] |
|
|
|
|
(38) 철학에서 지혜로, 종교에서 길로 |
|
불교는 철학입니까, 종교입니까?
저는 영어나 한문을 쓰기가 두렵습니다. 사전은 말의 거친 대강의 의미만 알려줄 뿐, 거기 담긴 구체적 맥락은 물론, 단어의 섬세한 감정과 뉘앙스까지를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외국어 속에 .. |
|
[2005-03-30] |
|
|
|
|
(37)법(法)도 또한 공(空)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
|
있다(有)·없다(無) 같은 말이라니?
제가 누누이, 우리가 객관적 사태라고 부르는 것 또한, 실은 주관적 관심의 흔적이요 그림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말과 이름은 이미 ‘오염’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다”는 물론이고,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 .. |
|
[2005-03-23] |
|
|
|
|
(36)-이름을 만나거든 이름을 베고 |
|
내 불성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다오
‘붓다뉴스’에 어느 분이, 제가 “불교학자나 철학자라기보다 에세이스트같다”라고 평을 해 주셨습니다.
제 글이 여느 불교학자들이나 철학자들과 다르게, 미안합니다, 딱딱하거나 고답적이지 않고, 문학적 향취가 있다는 뜻일 거 .. |
|
[2005-03-16] |
|
|
|
|
(35)밥 먹을 때 밥 먹고/한국학중앙연구원 |
|
누가 밥맛을 안다 하는가
정말이지 밥 먹기 힘듭니다. 세상에 어려운 것이 밥 먹는 일입니다. 도(道)가 차 한 잔에 있듯이, 선의 비밀은 우리가 밥을 제대로 먹게 되는 날, 자연히 얻어질 것입니다.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 .. |
|
[2005-03-09] |
|
|
|
|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법 |
|
음식은 목구멍 아닌 등줄기로 먹어야
불교는 지구적 화두인 생태학에 친화적입니다. 그 점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요. 둘 사이의 연관은 분명해 보이는데, 아직 본격 체계화는 되어있지 않아서, 불교생태학(Buddhist Ecology)은 아직 걸음마에 있습니 .. |
|
[2005-03-02]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