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有)·없다(無) 같은 말이라니?
제가 누누이, 우리가 객관적 사태라고 부르는 것 또한, 실은 주관적 관심의 흔적이요 그림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말과 이름은 이미 ‘오염’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다”는 물론이고,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은 ~이다”라는 것 또한 이미, 주변과 세상에 대한 모종의 ‘판단’인 바, 그것은 이런저런 관심과 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객관적 사태란 없습니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은데, 보다 정확하게는 “객관적 사태는,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가 되겠습니다.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객관적 사태가 아닙니다. 붓다는 그래서 “진리는 아리안의 고귀한 침묵 속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바, 법(法)도 또한 공(空)한 것!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이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일체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셨다고 했습니다.
술병에 반이나 남은 술
좀 어렵다고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가령 “술병에 술이 반밖에 안 남았다”와 “술병에 술이 반이나 남았다”는 서로 다른 진술입니까 같은 진술입니까? 아비달마라면, 여기서 ‘밖에’나 ‘이나’ 따위의 강조구는 분명 주관적 개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에 비해 “술병에 술이 반이 남아있다”는 진술은 객관적 법(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수 등이 주도한 대승의 중관(中觀)은, “술이 있다”라는 진술 자체가 이미, 술에 대한 발성자의 ‘관심’을 포함하고 있고, 그 사태를 향한 모종의 ‘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려 합니다. 관심이 없었다면 술이라는 대상은 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거기 얼마쯤 담겨 있는지가 눈에 들어오지는 더더구나 않았을 것이며, 당연히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말하는 유무(有無)는, 이른바 객관적 사태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렇게 자아의 관심에 의해 ‘의미화된 것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말임을 언제나 기억하세요. 불교가 유무(有無)를 말할 때, 그것은 법(法)이 아니라 상(相)에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요컨대 불교가 말하는 무(無)는, 교실을 들어서며, “어! 아무도 없네!”라며 문을 닫을 때 그때 판단한 ‘없음’을 가리킵니다. 그 교실에는 실제 여러 학생이 어울려 떠들거나 책을 보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다른 방에서 “기집애, 여기 있었네” 하면서 찾던 유(有)를 확인하고 안도할 것입니다.
유무(有無)에 대한 이 주관적 태도는 그 여학생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내 몸, 내 가족, 내 새끼, 내 편당, 내 민족, 내 국가라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돕니다. 그렇게 팔이 안으로 굽고, 제 편의대로 세상을 사는 바람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토록 갈등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기가 어렵습니다.
각자 독백만 하고 있는 분절된 삭막한 도시가 우리가 사는 풍경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금강경>이 그토록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을 경계하고 그것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야, 그리고 이름을 떠나야, 우리는 서로와 더불어 마음과 말을 나누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有)와 무(無)는 결국 같은 말이다?
유무(有無)와 시비(是非)를 말할 때, 오고감(去來)을 따질 때, 많고 적음(增減)을 말할 때, 좋고 싫음(好惡)를 말할 때, 그 어디든 아상(我相)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아상이 침묵의 실제(實際)를 간섭하고 그것을 토막 내서 차이를 만들고, 그것은 늘 차별로 미끄러집니다. 불교는 이 분별(分別)이야말로 세상의 비참과 곤혹을 불러오는 주범이라고 강조해 마지않습니다.
다시 기억하실 것은, 유(有)와 무(無)가 정반대의 극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두 아상(我相)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가 여러분들이 늘 만나는 불교 언설의 역설과 모순, 모호함과 아이러니의 진원지입니다.
불교는 경전의 언설장구(言說章句)마다, 유와 무가 결국은 같다는 것, 그 둘을 동시에 벗어나야만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고구정녕 가르칩니다.
불교, 그 가운데서도 중관(中觀) 불교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구는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有)도 아니다. 무(無)도 아니다. 유이면서 동시에 무인 것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도 또한 아니다.” 이 냉혹한 거절은 어떡하든 유와 무를 거머쥐려는 우리의 노력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차가운 거절이야말로 불교가, 그리고 나중 선의 조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열어준 노파심의 크나큰 은혜입니다.
대체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현실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들 그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것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작고 사소한 것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을 두고,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고통을 받았으며, 남들과 다투고 심리적 소모를 벌여 왔던 지를… 그것이 그토록 중요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지금 그것들은 다 어디 가 있나요. 불교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것을 두고 한 판단과 의견들이 다들 부질없는 어린애 장난 같은 것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그것들을 ‘문제’로 의식하지 않을 때, 그때 세세한 시비(是非)와 그 상위범주로서의 유무(有無)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래성을 쌓고 허물며 노는 아이들
그러니 바깥의 반연(攀緣)을 쉬고 깊이 숨을 들이키십시오. 세상은 본시 고요하고 평등(平等)한 것, 우리는 법계(法界)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조각을 하며 장난치고 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 놀이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성을 빼앗고 부수기에 으르렁대던 아이들도, 해질 무렵 어머니가 부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래성을 짓밟고 발로 이긴 다음, 저녁을 먹으러 달려가지 않습니까.
하나 더 유의할 것은, 이 소식을 가르치는 불교의 가르침 또한 실제 우리가 빈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유희의 마음으로 세상을 누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가르침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더 없이 위대한 지혜이고, 말후구(末後句), 즉 최종적인 한 마디인 만큼, 더 위태롭고 더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이 독성을 스스로 해독하고 나섭니다. “내가 말하는 지혜는 그러나 지혜가 아니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이 자기부정이야말로 불교가 진정 최상의 지혜임을 일러주는 증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