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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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속계와 법계, 야누스의 두 얼굴/한국학중앙연구원
사바에서 어떻게 무장무애를 얻나

원효 <화엄경소서>의 첫 부분을 보겠습니다.
(1) “대저 무장무애(無障無石疑)한 법계의 법문을 확인해보니, 법이 아니면서 법 아님이 없다. 그래서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또 여럿인 것도 아니다.” (原夫無障無碍法界法門者, 無法而無不法, 非門而無不門也. 爾乃非大非小, 非促非奢, 不動不靜, 不一不多. 由非大故, 作極微而無遺 以非小故爲大虛而有餘. 非促之故, 能含三世劫波. 非奢之故, 擧體入一刹. 不動不靜故, 生死爲涅槃, 涅槃爲生死. 不一不多故, 一法是一切法, 一切法是一法.)

불교의 유토피아
대저 법계(法界)는 어디 있나요. 그곳은 우리 모두가 그곳에 있고 싶어하는 ‘고향’같은 것일텐데, 우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애타게 갈망하지만, 도달하기 그렇게 어렵다는 그곳은 대체 어디일까요. 또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혹시, 그곳이 어디인지도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찾고 있지나 않습니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법계, 그곳은 무장무애(無障無石疑)하답니다. 절집의 용어로는 ‘걸림이 없다’고들 하지요. 걸림이 없다? 그럼, 그곳에 든 사람은 누구나, 가고 싶은 대로 가고, 머물고 싶은 대로 머물고, 그런 자유와 행복이 충만한 곳인 모양입니다.
그런 점에서 법계는 동양적 이상향인 무릉도원이나 유학자들의 오랜 꿈인 신선계, 기독교 문명의 행복한 정원 등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유토피아는 동서고금 모든 순례자들의 오랜 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의 법계의 유토피아는 다른 구원의 전통과는 좀 다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골자를 말하자면, 법계는 어디까지나 ‘지상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꿈꾸는 별 세계는, 물리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 밖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열 두번씩 또 다른 세상을 꿈꿉니다.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그 꿈은 더욱 크고 강렬하게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지금도 평창동 산 속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밧줄을 위해 밤새도록 울부짖고 있는 통성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하늘에서 무슨 줄이 내려올 것이며, 거기 잡고 올라갈 무릉도원이나 신선세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상의 서방정토
불교는 그 하이레벨에서, 이 낡고 후줄근한 지상을 떠나 상상의 유토피아나, 죽어 경험하게 될 천국이나, 뭐, 그런 초자연적인 영역은 꿈도 꾸지 말라고 단단히 오금을 박습니다. 이 지상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여기 지금 주어진 삶이 전부인 것입니다.
혜능이 <육조단경>에서 서방정토가 “지금 여기 있으니 내가 지금 보여주랴”고 했듯이, 그리고 <삼국유사>에서 사복인가요, 원효의 친구였다죠. 그 어머니 돌아가시고, 묻으려고 땅을 여니 그곳이 바로 서방이었다는 이야기들이, 이같은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철저한 믿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노리는 자유 또한, 당연한 귀결로, 이 차갑고 냉혹한 연기법(緣起法)의 세계, 그 지상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틀리다간 <무문관>에 적힌 백장(百丈 懷海 749~814) 회상(會上)의 그 노인네처럼, 500세, 1500년을 여우 거죽을 덮어쓰고 살아야할지 모릅니다. 그 노인은 “깨달은 사람은 인과(因果)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그리 되었다고 합니다.
백장의 훈수(一轉語)는 “인과에 혹하지 않는다” 였습니다. 여러분도 그 노인처럼 이 말에 깨달음을 얻고, 여우의 몸을 벗어났습니까. 대체 ‘떨어진다(墮)’와 ‘혹한다(昧)’ 사이는 어디서 갈라지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중대한 난관에 봉착합니다. 이 지상에서 어떻게 무장무애, 걸림없는 삶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디 우호적일 때가 있었습니까. 하나가 채워졌다 싶으면 더 많은 문제들이 쳐들어오며, 그것들을 처리하기에 내 지혜와 지식은 왜 또 이렇게 모자라는 것입니까. 세상은 온통 걸리고 비틀거리는 장애물들뿐인 것같은데, 대체 이 속에서 어떻게 절대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화두 가운데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그 물음을 안고 각자 정진할 일입니다.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이 물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과 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부닥치는 문제인 것을… 그리고 이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답되어야할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아무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야누스의 두 얼굴
원효의 말을 들어볼까요. 그는 지금 법(法), 그 영원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고 도달해야 할 그 지복의 나라에 대해서…
“법이 아니면서 법 아님이 없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법이 아니다’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곳에 법은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착각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법은 신성한 곳, 위대한 곳, 초월적인 것, 그리고 이른바 불교적인 것 속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이 지상의 삶 바깥에 무슨 멋진 라스베가스가 달리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시 ‘법 아님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진정 법이 숨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옛적 어느 선사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풍류가 아닌 곳에 진정 풍류가 있다.(不風流處也風流)” 제가 말씀드렸지요. 이 후줄근하고 비틀거리는 이 세상 속에 진정 법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속세이면서 곧 법계입니다. 물리적으로는 두 공간이 겹쳐 있습니다. 한 치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똑같은 세계가 한쪽 얼굴은 속계이고, 한쪽 얼굴은 법계입니다. 이 뜻을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다.
이 법계의 그림자를 엿보고 싶으십니까. 원효는 그 세계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또 여럿인 것도 아니다.”라고 설파합니다.
번잡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이들 설명은 매우 단순한 사실 하나를 보여주기 위한 고구정녕이니, 언설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현란한 수사는, “법계란 곧 삶의 과정 자체라”는 것, 그것은 회고나 기대로 추상화되거나 단편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채택하고 있는 역설과 모순은, 이 세계가 우리가 부여하는 모든 상대적 규정이나 제한, 의도나 목적 등에 미끄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연하게도 모순과 갈등 또한 이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우리네 삶의 과정은 갈등과 분열로 삐꺽거리는데, 물리적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는 이 세계는 무장무애로 걸림이 없다니, 이 자가당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난관에 제방의 선지식들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런, 그러고 보니, 질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200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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