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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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원효의 <진역 화엄경소(晉譯 華嚴經疏) 서(序)>/한국학중앙연구원
무장무애한 법계의 법문 어디 있는가?

원효의 스타일은, 그의 삶처럼, 좀 파격적인 데가 있습니다. 가령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소와, 당대 최고라는 현수 법장의 주석을 비교해 보십시오. 법장이 해당 경전의 의미를 풀이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원효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텍스트와 자신의 경험이 만나는 자리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법장의 글이 학자답게 정통적 논소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반면, 원효의 글은 철인답게, 자신의 통찰을 전달하기 위해 독자적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로 하여 원효의 글은 남다른 생기와 파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쓴 <진역 화엄경소>의 서(序), 그 전문입니다.

원효가 전하는 화엄의 근본 소식
晉譯華嚴經疏序 釋元曉 撰
(1) 原夫無障無碍法界法門者, 無法而無不法, 非門而無不門也. 爾乃非大非小, 非促非奢, 不動不靜, 不一不多.
由非大故, 作極微而無遺 以非小故爲大虛而有餘. 非促之故, 能含三世劫波. 非奢之故, 擧體入一刹. 不動不靜故, 生死爲涅槃, 涅槃爲生死. 不一不多故, 一法是一切法, 一切法是一法.
(2) 如是無障無 之法, 乃作法界法門之術, 諸大菩薩之所入也, 三世諸佛之所出也, 二乘四果之聾盲, 凡夫下士之所笑驚.
若人得入是法門者, 卽能不過一念普現無邊三世, 復以十方世界 咸入一微塵內. 斯等道術 豈可思議.
(3) 然依彼門 用看此事, 猶是一日三出門外, 十人共坐堂內, 俓然之域, 有何奇特. 況乎, 須彌入於芥子者, 禾弟來入於大倉也. 方丈內乎衆座者, 宇宙內於萬物也. 內入甚寬,何足爲難乎哉.
若乃鳳皇翔于靑雲, 下觀山岳之卑, 河伯屆乎大海, 顧羞川河之狹. 學者入乎此經普門, 方知曾學之齷齪也.
然短 之鳥, 庇山林而養形, 微 之魚, 潛涓流而安性. 所以淺近敎門 亦不可已之耳.
(5) 今是經者, 斯乃圓滿無上 頓敎法輪, 廣開法界法門, 顯示無邊行德. 行德無畏而示之階階故, 可以造修矣. 法門無涯開之的的故, 可以進趨矣. 趨入彼門者 卽無所入故, 無所不入也. 修行此德者, 卽無所得故, 無所不得也.
於是三賢十聖, 無行而不圓, 三身十佛, 無德而不備. 其文郁郁, 其義蕩蕩, 豈可得而稱焉.
(6) 所言大方廣佛華嚴者, 法界無限大方廣也, 行德無邊佛華嚴也.非大方, 無以廣佛華, 非佛華, 無以嚴大方. 所以雙擧方華之事, 表其廣嚴之宗.
所言經者, 圓滿法輪 周聞十方, 無餘世界, 遍轉三世, 無際有情, 極軌窮常, 故名曰徑. 擧是大意 以標題目, 故言道大方廣佛華嚴經也.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번역도 암호처럼 우선 해 봅니다.

서문을 초벌로 번역하면
(1) 대저 무장무애(無障無 )한 법계의 법문을 확인해보니, 법이 아니면서 법 아님이 없다. 그래서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또 여럿인 것도 아니다.
크지 않은 까닭에 극미(極微)를 지어도 남김 없이 들어가며, 작지 않은 까닭에 태허(太虛)라 하더라도 오히려 남은 자리가 있다. 짧은 시간이 아니기에 거기 삼세겁을 포함하고 있으며, 늘어진 시간이 아니기에 거체(擧巨)가 한 순간에 들어간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닌 고로,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까닭에, 한 법이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한 법이다.
(2) 이렇게 무장 무애한 법이 법계법문의 술(術)이 되니 그곳은 제 보살이 드는 바요, 삼세 제불이 나오는 바이며, 이승(二乘) 사과(四果)가 귀먹고 눈멀어지는 곳이고 범부 하사(下士)들의 멋모른 웃음거리가 되는 소이이다.
이 법문에 든 사람은 한 생각에 능히 무변 삼세를 나툴 수 있고, 시방세계를 온통 한 티끌속에 넣을 수 있으리니, 이같은 도술을 어찌 가히 사의(思議)할 수 있겠는가.
(3) 그렇지만 저 문(彼門)에 기대 이 일(此事)을 보게 되면, 하루에 세 번 문을 나서는 것같고, 열 사람이 방안에 앉은 듯 덤덤한 세계이니, 무엇 기특한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는 일이 제미(禾弟米)를 큰 창고에 들이는 듯하고, 방장(方丈) 안에 여러 사람 들어차는 것이 넓은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듯 힘들지 않고 무난하다. 어디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는 봉황이 푸른 구름을 타고 올라 산악의 낮음을 바라봄과 같고, 하백이 한바다에 이르러 시내 황하가 좁았음을 겸연쩍어 하는 것과 같으니, 배우는 자는 이 경전의 너른 문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배운 것이 악착했음을 알리라.
그렇지만 날개 짧은 작은 새는 산림에 의지해서 크고 있고, 송사리처럼 작은 물고기는 여울에 살면서도 본성에 편안한 법이니, 천근한 방편의 가르침이라 하여 내버릴 수 없다.
(4) 지금 이 경은 원만무상의 돈교법문이라, 법계법문을 널리 열어 무변의 행덕(行德)을 현시한다. 행덕을 거리낌없이 내보여도 스텝이 있는 까닭에 가히 닦을 수 있고, 법문이 끝이 없으나 열어도 모두 부합하는 까닭에 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문에 초입(超入)한 사람은 들어섬이 없기 때문에, 들어서지 않음이 없다. 이 덕을 닦는 사람은 얻음이 없기 때문에 얻지 않음도 없다. 삼현 십성이 이에서 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삼신시불이 구비치 않은 덕이 없으니 (화엄경의) 그 문장이 밝게 빛나고 그 뜻이 넓고 무궁함을 무슨 말로 칭탄하랴.
(5) 대방광불화엄(大方廣佛華嚴)이란 이름은, 법계가 무한하기에 대방광(大方廣)이요, 행덕이 끝이 없으므로 불화엄(佛華嚴)이다. 대방이 아니면 불화를 넓힐 수 없고, 불화가 아니면 대방을 장엄할 수 없다. 이래서 방(方)과 화(華)의 뜻을 함께 들어 그 광엄(廣嚴)의 종(宗)을 드러냈다.
이른바 경(經)이란, 원만 법륜이 시방에 두루 들리고, 무여(無餘) 세계의, 삼세를 두루 전하니 끝없는 유정(有情)들의 지극한 궤도요 최종적 진리라, 그래서 ‘길(徑)’이라 부른다. 이 취지를 들어, 제목에 걸었으니, 고로 <대방광불화엄경>이라 한다.

수수께끼의 단서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기 힘들다고요. 번역이라고 해 두었지만, 이런 초벌 수준의 언해(諺解)로는 정확한 뜻이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같은 글을 서너 회에 걸쳐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겁먹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결코 황당한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그것이 전하는 소식은, 강의 첫머리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부연 사족을 달기 이전에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혹, <화엄>의 소식이 좀 독특하다 한다면, 그것 또한 제가 이제까지 구구절절 설명해 드린 것 속에 드러나 있으니, 그것 또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200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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