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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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이름을 만나거든 이름을 베고
내 불성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다오

‘붓다뉴스’에 어느 분이, 제가 “불교학자나 철학자라기보다 에세이스트같다”라고 평을 해 주셨습니다.
제 글이 여느 불교학자들이나 철학자들과 다르게, 미안합니다, 딱딱하거나 고답적이지 않고, 문학적 향취가 있다는 뜻일 거라 짐작하고, 으쓱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디 한번 물어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의 세 ‘이름’들은 서로 다른 이름들인가요. 가령 에세이스트라면 불교학자나 철학자일 수 없고, 불교학자는 또 철학자와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일까요. 제가 옛적에 쓴 책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를 두고, 어느 기자가 신문서평에서 ‘한문학자’라고 규정하는 바람에, “아차, 한문학 하시는 분들이 한 소리들 하시겠군”이라고 뜨끔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도, 불교학자, 한문학자, 에세이스트
저는 이 모두의 이름에 걸쳐 있지만, 어느 하나도 꼭 집어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학의 철학과를 나왔으니 ‘철학도’일 것이나, 불교를 공부했으니 ‘불교학자’가 아니라고도 못하겠고, 글에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으니, ‘문학도’는 낯간지럽지만, ‘문학적’이라거나 ‘에세이스트’의 이름을 쓴다 해도 큰 죄가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살아있는 저를 감당하기는 태부족일 것입니다.
‘이름’에 너무 고집하거나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어떤 특성들을 거칠게, 그리고 임시적으로 보여줄 뿐, 그 안에 무슨 고유한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을 규정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알려주고, 또 어떤 측면을 보여주지만, 끝끝내 여러분 자신들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아침 풀잎 위의 이슬처럼 미끄러져 굴러 떨어집니다.
이름은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드러난 이미지(相)입니다. 사람들은 그 방식이 사물의 자체적 성질에 따른 것이기에 객관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객관적 정보이고 지식이라고 해도, 이름에는 또 다른 측면, 즉 제가 저번 강의에서 누누이 말한 대로, 사물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가치의식’이 함께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떤 말들은 객관적 정보는 없고, 감탄사나 욕처럼, 호오와 편견만 들어 있기도 합니다.

이름의 두 얼굴, 정보와 감정 사이
1) 정보로서의 말은 우리가 편의를 위해, 일정한 목적 아래서 소통하고 이용하고 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말과 이름을 떠나 살 수 없지요. 우리는 이것들을 태어나면서 배워 습득했고, 그 관행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사람들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이 말과 이름들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열심히 이들을 공부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신문과 매스컴, 그리고 회사나 공장에서 이들을 습득하기 위해 그리 애쓰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말이, 이름이 자기를 표현하고 감정과 의지를 담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곳은 바로 이 이름과 말의 주관적 측면입니다. <금강경>이 전편을 통해, 이름을 썼다가 지우는 작업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말들은 좋아하고, 어떤 말들은 싫어합니다. 어떤 말은 더 좋아하고, 어떤 말들은 더 끔찍해합니다. 앞의 예를 들면, 저는 에세이스트보다 불교학자나 철학자라는 이름을 더 기뻐하거나,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쓴 분이나 저나 대체로 이 세 이름이 다 ‘있어 보여서’ 좋아할 것이라는 동의가 깔려 있지만, 가치를 부여하고 선호하는 것이 엇갈리기도 합니다. 제 딴에는 칭찬한다고 했던 말이 영 아니었던 경우도 있고, 남은 경멸한다고 제게 던진 말이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름으로 하여 생기는 오해와 갈등은 심각한 바 있습니다. 상사와 동료 사이에서 싸움을 중재한 제 친구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어제 보니 꼭 토요토미 히데요시같더군!”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새기겠습니까. 당사자는 모욕적으로 들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그의 신발을 품에 안는 지극한 충성으로 신임을 받은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속상해하는 그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의 중재 능력과 리더십을 높이 산 것이야. 토요토미가 전국시대를 청산하고 천하를 통일한 위업에 빗대 그런 말을 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이름으로 상처주지 마십시오. 비난하려거든 솔직하게 하십시오. 악의를 숨기고 복선을 깔아 모호하게 빗대 상처 주는 것은 비열한 짓입니다. 불교의 근본 계율, 불망어(不妄語)를 가슴에 새겨두십시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름에 상처받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하십시오. 칭찬은 무엇이고, 비난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이해관계와 호오에 따른 또 다른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칭찬과 비난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것이지, 남의 입과 생각을 빌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탄식을 기억합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스스로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보다 남의 의견을 더 존중하는 것일까.”
그러니 어떤 이름에도 기죽거나 슬퍼하지 말고, 떠 어떤 이름에도 잘난 척하거나 기뻐하지 마십시오. 그 이름들은 남들이 바깥에서 준 상표 혹은 딱지일 뿐, 여러분의 생명 자체에, 여러분의 불성 자체에 걸맞는 이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이나 그 불성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이 전하는 대로, 여러분은 들판과 우주에 마음대로 피어있는 화려한, 이름 없는 들꽃들(雜花)입니다.
높거나 낮거나 간에, 평가를 하고 가치를 매기는 이름이란 인간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편협한 잣대에 따라 붙여준 바깥의 물건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것들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30강에서 부대사가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두고, 읊은 노래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대는 이름의 고착과 환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若悟眞空色, 然去有名)”
낮고 천한 것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있는 이름들일수록, 자신을 옭죄고 사람들과 편안하게 교제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재산, 지위, 명예 등의 외면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종교적 진리까지, 그것이 ‘이름’일 때는 결연히, 버려야만, 다시 말하면 임제의 칼날처럼 “아버지를 베고 붓다와 조사를 죽여야만,” 우리는 각자 자신의 다이아몬드의 불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이 말합니다. “수부티야, 내가 말하는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니다(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불교는 그 단호한 칼날의 버힘 위에서 비로소 꽃피기 시작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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