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왜 이렇게 서론이 길었나 |
|
<금강경>의 별기(別記)를 마치며
이제 서론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강의를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시간에 쫓겨 밀리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훌쩍 갔습니다.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 귀한 지면을 .. |
|
[2005-07-27] |
|
|
|
|
(53)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한국학중앙연구원 |
|
돈교는 불교에 물든 사람을 위한 해독제
돈교의 설파 이후, 우리는 아득해집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고, 아무것도 얻은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깨우친 바는 다만, 그동안 우리가 문제를 잘못 설정했다는 것, 그래서 잘못된 해결책을 더 .. |
|
[2005-07-20] |
|
|
|
|
(52) 마조의 즉심즉불(卽心卽佛) |
|
부처가 ‘되려고’ 기웃거리지 마라
돈교는 선의 표어입니다. 그것이 혜능 이래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서로 표현은 다르고, 스타일은 달랐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소식은 부절(符節)처럼, 꼭 같았습니다.
오늘은 그 증거 하나로 마조(馬祖道一, 709~78 .. |
|
[2005-07-13] |
|
|
|
|
(51)불교(佛敎),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한국학중앙연구원 |
|
점수(漸修)는 돈오 그것을 실천하는 일
좀 엽기적이었나요. 돈오가 ‘깨닫는 경험 혹은 사건’을 말하지 않고, ‘깨달음의 성격’에 대한 지적(知的) 통찰 혹은 이해라는 말에…. 아직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신 분들을 위해 이 말을 좀 더 부연해 보기로 .. |
|
[2005-07-06] |
|
|
|
|
<50>-돈교(頓敎)의 법문(法門)이란 무엇인가 |
|
돈오란 깨달음의 ‘특성’ 알려주는 말
<진역 화엄경소>의 마지막 단락을 보겠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총섭(總攝)하는 일구인 돈교법문(頓敎法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4) “지금 이 경(經)은 원만무상(圓滿無上)의 돈교법 .. |
|
[2005-06-29] |
|
|
|
|
(49)원효와 장자/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 언덕에 어른거리는 게 소냐 말이냐
원효의 글은 비유가 풍부하고 수사가 화려합니다. 가령 <대승기신론소>나 <금강삼매경론>의 서문을 보십시오. 서로 모순되는 두 항을 설정하고, 그것들이 서로를 물고 뒤채도록 몰고 가는 그 현란한 솜씨를… 그 끝에서 우리는 .. |
|
[2005-06-22] |
|
|
|
|
(48) 봉황의 안목, 송사리의 물차기 |
|
가깝게 보이는 산, 그러나 길은 험하다
말이 난 김에, ‘불교와 주자학’을 본격 짚어나가려 했는데, 가던 길이 있어 우선 접습니다. 저번에 원효 스님의 <진역 화엄경소>를 두 번째 단락까지 살피다가, 엉뚱한 데로 튀었지요. 오늘은 그 자리를 이어 세 번째 .. |
|
[2005-06-15] |
|
|
|
|
(47)주자학, 불교에 근접하여 새로워진 유교/한국학중앙연구원 |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명덕(明德)은 아시다시피,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 첫머리에 나오는 표준구입니다. 명명덕어천하(明明德於天下), 즉 인간 교육의 목표, 혹은 위대한 정치의 이상은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것”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명덕이 무 .. |
|
[2005-06-08] |
|
|
|
|
<46> 손을 넣어 보니 옹달샘이 시리네 |
|
이런… 주자학의 반쪽이 불교라니
저는 지금 북경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호텔 안이나 주변에는 내 웹하드에 접속할 인터넷이 보이지 않고, 잘 아는 청화대학 교수의 방에 갔지만, 이번에는 한글 파일을 열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깔려있지 않았습니다. .. |
|
[2005-06-01] |
|
|
|
|
(45)일즉다 다즉일(一法是一切法, 一切法是一法)/한국학중앙연구원 |
|
화엄은 세상이 더없이 완전하다는데
오늘은 <진역 화엄경소>의 서문, 그 두 번째 단락을 점검하겠습니다.
(2) 이렇게 무장 무애한 법(法)이 법계법문의 술(術)이 되니 그곳은 제 보살이 드는 바요, 삼세 제불이 나오는 바이며, 이승(二乘) 사과(四果 .. |
|
[2005-05-25]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