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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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한국학중앙연구원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미지와 환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환상의 세계 안에, ‘너와 내’가 있고, ‘옳고 그름’이 있으며, 마침내 ‘있고 없음’의 분별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중언부언 주절주절 읊고 더듬어 왔습니다. 불교의 지혜란 바로 이 근본 사실을 통찰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실제를 말할 수 있는가
깨달음이란, 인류의 오랜 환상을 떠나 삶의 실제(實際)와 만나는 것입니다. 아 참, 불교가 진리의 이름으로 이 ‘실제’를 쓴다는 것을 유념하시면 좋겠습니다. 무명(無明)의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을 투명하게, 자아의 점착을 떠나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그때가 열반, 즉 자유와 불멸을 얻는 때입니다.
이때 드러나는 실제(實際)는 자아의 점착성을 떠나 있으므로 존재로도 비존재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실제 앞에서는 일상적 언어와 관념이 경계와 예각을 잃고 미끄러집니다. 누가 눈앞에 역역한 이 적나라한 실제에 이름표를 붙이겠습니까. 이 절대는 인간적인 흔적들을 떠나 있기 때문에 모순이나 갈등 또한 발붙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시간도 공간도 의미를 잃습니다.
공간부터 살펴볼까요. 공간의 분할과 의미는 전형적으로 인간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물 사이를 가르고 분류하는 방식이 문화권마다 서로 너무나 다른 것을 떠올려보시면 짐작하실 것입니다. 나와 책상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 말에 다들 놀랍니다마는, 저는 그런 분들에게, 노장과 불교의 지혜를 따라 이렇게 묻습니다. “그 구분은 사물의 성질 자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의견에 따른 것 아닐까요. 예를 들면 저는 바닷가에서 자랐어도 생선의 종류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맛이 있는지 없는지, 신선한지 아닌지는 지나치다싶게 섬세하게 구분합니다.” 공간들은 ‘그 자체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구분되지 않기에 높다와 낮다, 크다와 작다ꮀ€ 실제(實際)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화엄경>의 수수께끼 같은 언설, 선사들의 반복되는 역설이 비로소 이해될 것입니다. “수미산이 겨자씨 속으로 들어가고,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찬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세계
시간은 인간에 의해 추상화된 것일 뿐,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간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아, <금강경>의 유명한 사구게가 이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다들 아실 것입니다.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진정 살아있고, 살아가는 순간에는, 거기에는 시간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있음의 현장을 떠나, 그 일체와 몰입의 순간을 떠나 마음이 콩밭으로 떠날 때 비로소 시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랑이 식거나 또 내일 회의가 있거나, 오늘처럼 원고마감에 쫓길 때 말입니다.
<금강경>은 시간이 없다 하는데, <화엄경>은 시간들이 서로 침투 융섭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말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시간은 상상된 관념인데, 구체적 경험 속에는 추상이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무량겁(無量劫)의 시간이 일념(一念)에 나타나고, 현재 속에 삼세(三世)가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으므로, 그 자연적 귀결로 생사(生死)가 없습니다. 하여 “생사가 곧 열반!”입니다. 이 통찰을 얻은 자 영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붓다는 이 오랫동안 묻혀졌던 진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이 길은 그러나 붓다에게만 열린 길이 아니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길은 늘 ‘옛 길’입니다. 불교는 그래서 고타마 붓다 이전에 수많은 붓다가 있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붓다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지구만이 아니라 수많은 세계 체계에서 수많은 붓다가 또 그렇게 깨달아 그 진실을 설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깨달음은 깨달음 가운데, 가장 높고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나 이 깨달음이, 오랫동안 차폐된 공간에서 의식을 집중하여 자아나 화두를 응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불교적 깨달음이 동서양의 정신적 지혜의 전통에서 보편적 성질의 것이며, 그것의 획득은 오히려 일상의 공간에서 삶의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화엄경>이 선재동자의 구도 순례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닐까요. 산사의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살아가는 모든 중생들의 얼굴이 바로 선지식의 광명을 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수많은 여래 가운데 하나이니, 스스로 보살이고 여래라는 생각의 연금술, 그 믿음을 일으키십시오.

모두 평등한 금사자들
메난드로스 왕이 인간의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어째서 사람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단명하고, 어떤 사람은 장수합니다. (…) 어떤 사람은 아주 넉넉하게 지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며, 어떤 사람은 미천하고, 어떤 사람은 고귀하며, 어떤 사람은 어리석고, 어떤 사람은 현명합니다.”
“대왕이시여, 어째서 수목은 똑같지 않습니까. 왜 과일도 어떤 것은 시고, 어떤 것은 짜고, 어떤 것은 쓰고, 어떤 것은 맵고, 어떤 것은 씁쓸하고 어떤 것은 달겠습니까.”
“그것은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왕이시여, 업(業)이 제각기 다르므로, 사람들은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명하고, 어떤 사람은 오래 살며, 어떤 사람은 병이 많고, 어떤 사람은 무병합니다. (…) 어떤 사람은 천하고 어떤 사람은 고귀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고, 어떤 사람은 현명합니다.”
불교는 이 차이를 산술적으로 평균화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수용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니체의 영웅주의를 닮았습니다.
화엄의 종장(宗匠), 법장(法藏)은 측천무후를 위해 화엄의 이치를 금사자(金獅子)로 비유해서 강설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금사자장(金獅子章)>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물과 사건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다른 것은 다만 형태일 뿐, 본질은 아닙니다. 사람들도 모두 부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거죽의 모습이 좀 다른 것은 다만 우연적 차이일 뿐이고, 실제 그 모두는 크고 작고가 나름대로 법계(法界)의 영광과 그 현란한 무도의 주인공들입니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 분별(分別)의 장애물을 치워야 하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외적 조건들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다치지 않으면서 각자 꽃피기 시작합니다.
200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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