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그대로 두고 새 가람 지으면 어떨까
기이한 일입니다. 원고 파일이 사라졌습니다. 전날 한 작업을 편집부에 보내고, 몇 군데 손을 보려고 오늘 아침 파일을 열어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 초안 시작할 때의 것이 화면에 뜨는 것이 아닙니까. 이 황당한 사고를 어쩌노 하다가, 원고를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낙산사가 불타다니
전날 밤의 취지를 기억을 더듬어 다시 ‘복원’해 나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럴 때는 ‘새로’ 쓰는 것이 쓰기도 흔쾌하고, 또 읽기도 부담없습니다.
기이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지난호 연재가 ‘원효가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만난 이야기’인데, 원고를 송부한 다음날, 동해를 덮은 큰 화재로 낙산사가, 저런,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관음굴(觀音窟), 즉 홍련암은 무사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나마 안도했습니다.
이 비극에 그러나,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싶습니다. 문화재청이 중건 불사를 전폭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불교계의 관심과 지원이 대거 몰릴 것입니다. 저는 이 사태를 전화위복의 새로운 전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들 낙산사와 동종을 ‘복원’으로 접근하는데, 저는 ‘창조’의 컨셉으로 접근하기를 권합니다. 폐허를 폐허대로 두고, 동종은 또 녹은 대로 두고, 거기 새로운 가람과 전혀 다른 종을 달아매는 것이 어떨른지요.
어제 저녁 논설위원 모임에 참가하신 윤범모 교수님도, 일본의 호오류우지(法隆寺)가 어느 조사원의 실수로 불탔는데, 그 불탄 흔적을 한 켠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폐허가 인간을 가르칩니다. 특히 불교는 그렇습니다.
삶의 무상과 유위(有爲)의 허망함을 일깨우기 위해, 갠지스 강가에서 죽은 시체와 더불어 지내는 부정관(不淨觀)을 닦지 않습니까. 그 썩어가는 과정과 풍화해가는 모습이, 삶을 소유로부터 존재에로 전화시키는 회향의 계기가 됩니다. 불교는 그래서, 다른 종교와는 달리, 폐허를 통해서 삶을 배우도록 가르칩니다.
불타버린 낙산사와 녹아내린 동종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입니까.
저녁 2차 찻집에서 만난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종림스님이 촌철살인의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생겼다 무너지는 것, 그것이 불교지요!” 그렇지요. 고구에 정녕,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도 이번 불타버린 폐허를 폐허대로 두기를 바랍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의 눈으로 보면, 복원이란 어불성설의 개념입니다. 지금 지은 가람도 천년전 의상대사가 건립한 그 절이 아니라, 50년전 전쟁 통에 새로 지은 것이고, 동종 또한 사실상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형태와 구조에 대한 엄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해도, 소리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더이다.
불교, 지구적 복음
저는, 이 참에 낙산사의 가람을 초현대식으로 지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조화된 건물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상징과 실용 두 면을 동시에 고려하여, 현대인들의 시선도 사로잡고, 그러면서도 수행도량에 부족함이 없도록 만든다면, 세계적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기념비적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겠다는 턱없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복원’이 아니라 ‘적응’이 관건입니다. 불교가 살아있는 전통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세계를 주시해야 하고, 중생들의 변화하는 욕구에 민감해야 합니다.
제 강의를 듣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템플스테이 계획을 말했더니, 다들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까운 청계사에 들러 절을 안내하고, 성행 스님에게 참선 지도를 부탁했더니, 학생들은 굳은 다리로 가부좌를 하고, 무심을 체험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 한 학생은 자신이 기독교도이지만, 참선이 기독교 교리에 반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예배라고 말해주었고, 불가리아에서 온 여학생은 자신이 내면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불교와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은 인연을 ‘이미’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감격해 했습니다.
학생들은 다들 산사에서 하루쯤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싶어했습니다. 적절한 산사를 찾아보겠다고 하자, 그들은 이런 주문을 보탰습니다. “화장실만 괜찮다면요.” 그들은 우리의 오랜 전통인 푸세식에 질겁을 했습니다. 화장실 문화도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니 그것을 인고로 지키라는 것도 수행이겠지만, 그 억지가 오히려 불교에 대한 적절한 접근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템플스테이만 해도, 전혀 새로운 경험, 재가(在家)와 재사(在寺)의 새로운 연대이고, 실험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지금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한국문화의 얼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월정사의 단기출가 프로그램을 보고 가슴 깊이 울리고 젖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중생과 더불어’는 앞으로의 불교를 이끄는 새 화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대승의 근본정신입니다.
불도들이 날마다 읊는 삼귀의(三歸依) 또한 재가와 재사를 아우르는 ‘공동체’에 대한 회향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함께 참석했던 성태용 교수님은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구절 자체를 법답게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내가 그리는 새 낙산사
저는 늘 불교가 너무 멀리 있다는 안타까움을 가져왔습니다. 절은 예배의 장소로만 있고, 스님들은 좌선과 입정에만 계셔서 도무지 말을 붙이기 힘들었습니다. 법문을 듣자고 해도, 주말에 법회를 여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둘 사이에 소통이 있어야 불교가 살아있는 전통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우연한 계기로 월드컵 문화시민 운동의 기획에 간여하게 되었고, 거기서 저는 산사체험 프로그램을 제안했습니다. “산사의 공간은 그 공간 자체만으로 엄청난 자원이다. 거기다 약간의 수행 프로그램만 보태면, 놀라운 치유의 효과를 대중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외국인들에게도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의 전통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월드컵과 더불어 시작된 이 프로그램이 이후 정착이 되고,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재사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 여기 동참하는 재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또한 커졌습니다.
이 새로운 운동을 깊이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성공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세심하게 살피며, 아울러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또한 열린 마음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요컨대 체(體)는 살리고, 용(用)은 고치는 것이 불교의 오랜 전통인 방편(方便) 정신 아닙니까. 낙산사는 복원(復元)되기보다 중창(重創)되어야 합니다.
낙산사를 새로 세웁시다. 저는 이즈음, 한편에 초현대식 건물이 관광명소이자 수행공간으로 있고, 그 한편에 폐허의 옛 절터가 공존하는 그림을 그려보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