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철학입니까, 종교입니까?
저는 영어나 한문을 쓰기가 두렵습니다. 사전은 말의 거친 대강의 의미만 알려줄 뿐, 거기 담긴 구체적 맥락은 물론, 단어의 섬세한 감정과 뉘앙스까지를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외국어 속에서 젖어 살아보아야 합니다. 사전의 풀이에만 의존해 영어나 한문을 말했다가, 오해와 불통으로 고생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 곤혹이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유희와 편견으로서의 말
각각의 언어는 사물을 분류하는 나름의 체계를 갖고 있고, 그들 사물에 서로 다른 의미와 상징, 그리고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런 점에서 말과 이름은 사물 자체의 성격을 보여준다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사물을 구분하고 연관짓는 의미화의 방식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의미화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에, 그래서 제가 한사코, 노장과 불교의 근본 통찰을 따라, 말과 이름이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것임을, 실체적 고정적이기보다 임의적이고 유동적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런 점에서 ‘진리’보다 ‘유희’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달리 말하자면 말과 이름은 ‘사실’이기보다 ‘편견’이기 쉽습니다. 말은 위험하고 미끄러운 도구입니다.
각설하고, 각각의 언어는 사물을 분류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서로 다른 체계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불교를 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불교는 철학이요, 종교요?” 이 질문에 곤혹스러워하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네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교는 철학이다.” “불교는 종교다.” “불교는 철학이기도 하고, 종교이기도 하다.” “불교는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제가 늘어놓은 선택지를 보고, 곧 바로 “아, 이것 용수 나가르주나의 사구(四句)를 닮았다”고 느끼신 분은 불교를 고민해 보신 분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맞을까요. 용수 나가르주나는 이 모두가 틀렸다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철학은 원래 그리스에서 태동해서 오랜 변화를 거쳐 온 서구적 전통의 산물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혔을 뿐, 그밖의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이 세상의 고통과 곤혹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내 말을 듣고 익혀라.” 불교는 그래서 서구의 근대철학이 설정한 인식론적 관심과 논리학의 엄밀한 방법을 의식하거나 적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철학이 아닙니다.
불교는 종교인가, 아니면 가르침인가
불교는 또 종교일까요. 기억하십시오. 불교(佛敎)는 이름 그대로 다만 ‘붓다의 가르침’이었을 뿐, 그것이 종교냐 아니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철학이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 ‘필로소피(philosophy)’의 번역어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릴리젼(religion)’의 번역어일 뿐입니다. 당연히 그 전통과 역사는 서구의 것이고, 그 기준 또한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에 걸맞게 ‘유일신’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무신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기독교와 맞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선전한 전략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초월적 인격을 믿고, 그에 의존하는 것을 삶의 길로 채택하는데 대해, 불교는 자신의 불성을 믿고, 그것을 깨달음과 수행으로 개화시켜 나가는 자력의 지혜라는 뜻에서 그렇게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불교는 수많은 신화를 갖고 있고, 불보살들의 세계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론이라기보다 다신론의 체계입니다. 또 대승의 발전에 있어, 대승이나 일심 등의 근본 원리를 축으로 한다는 점에서 범신론적 체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불교는 초월적 인격이 저 하늘 꼭대기에 있어서 인간의 일을 감시하고 심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르게 말합니다. 종교의 기준을 초월적 인격으로 설정하는 것은 너무 유대교적 기독교적 편견이라면서, 종교의 핵심을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전향시킨 것입니다. 루돌프 오토가 설정한 이 기준으로 하자면, 불교나 유교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최종적 관심을 축으로 돌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깊이 ‘종교’입니다.
또한 앞에서 철학 또한, 원래 인식론의 복잡성이나 논리적 엄밀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원래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랬듯이, 삶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규정한다면, 불교와 유교만큼 철학적인 것이 다시 없습니다.
철학이나 종교에서 지혜로 거듭나야
그런데 이제까지는 이렇게 유연하게 여유 있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이 아니라 하면 체계도 없고 논리도 허술한 잠꼬대로 오해할까 극구 철학이라고 변명했고, 종교가 아니라면 유일자의 중심도 없는 다신교 정도로 미신 취급을 받았기에 극구 종교라고 강변했던 것입니다.
회고해보면, ‘철학’과 ‘종교‘의 새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유구한 전통의 불교와 유교는 때 아니게 정체성을 의심받고 정당성을 도전받게 되었습니다. 그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질문은 권력적입니다. ‘누가 묻는가’의 주도권을 서구가 거머쥠으로써,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불교와 유교는 혹은 부끄러워하고 혹은 변명하고 혹은 저만큼 피해갔습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너희들 기준으로 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유교 또한 철학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가르침이고 배움이면 족하지 않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물을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는 과연 깨달은 사람이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해탈을 위한 적절한 지혜인가 아닌가.”
백년의 추궁을 당한 끝에 이제는 질문의 마이크를 불교와 유교도 쥐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역시 삶의 기술(art)이어야 하고 종교는 역시 인간의 길이이어야 한다는데 서양이 한발 앞서 숙이고 들어온 것입니다. 러셀 이래, 철학이나 종교는 삶의 보편적 문제이며, 서양의 전통만큼 동양의 정신적 전통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의 문명사적 조우가 가져올 의미가 심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규정을 받아들인다면, 서양과 동양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풍요롭게 대화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자신의 ‘이름’을 너무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대화와 소통은 타자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또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한 걸음 유보하고 비워주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저쪽은 ‘철학’이나 ‘종교’의 현실적 실용적 차원을 고민해주어야 하고, ‘불교’와 ‘유교’는 자신을 대단하다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달라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가치를 입증할 적절한 방도를 찾아나가야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