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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 스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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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만주 왕청의 토굴에서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던 청담(靑潭, 1902~1911) 스님이 주먹밥과 짚신을 받아들고 수월 스님에게 마지막 절을 올렸다.
그러자 수월 스님은 갑자기 청담에게 곳간에 가서 괭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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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9 오후 3:2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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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 스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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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마을 훈장으로 살던 경허(鏡虛, 1849∼1912) 선사는 열반이 가까워 병이 들어 누워있었다.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은 여기 저기 물어서 마침내 스승 경허가 있는 곳을 찾아왔다. 해질 무렵, 서당에 도착하여 섬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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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2 오후 2:2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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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 스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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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수월 스님이 만공 스님과 한담을 나누다가, 숭늉 물그릇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 숭늉그릇을 숭늉그릇이라 하지도 말고, 숭늉그릇 아니라 하지도 말고, 한 마디 똑바로 일러 보소.”
만공 스님이 문득, 숭늉그릇을 들어 밖으로 집어던지고 묵묵히 앉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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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0 오후 5:3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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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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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어느 날, 한암(漢巖, 1876∼1951) 스님이 상원사에 주석할 때의 선화다.
월정사 종무소에서 전갈이 오길, 일본 조동종 관장(종정)을 지낸 경성제국대학 사토 타이준(佐藤泰舞) 교수가 면회를 요청하니 곧 내려오시라는 것이었다. 그 때 상원사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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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5 오후 3: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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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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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滿空, 1871∼1946) 선사가 묘향산에 있던 한암(漢巖, 1876∼1951) 선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이별한 지 10여 년이나 되도록 서로 거래가 없었도다. 구름과 명월과 산과 물이 어디나 같건만, 북녘 땅에는 춥고 더움이 고르지 못할까 염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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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5 오전 10:5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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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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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승려 사토(佐藤泰舞)는 우리 불교계를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한암(漢巖·1876∼1951) 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한암 선사는 곁에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올렸다.
다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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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3 오후 3:3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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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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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경허 스님은 가야산 해인사 북서쪽 20km 지점에 위치한 수도산의 청암사 수도암에서 머물렀다.
그때 26세의 한암 스님은 51세의 경허 스님을 처음 만난다. 이곳에서 한암 스님은 경허 스님의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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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오후 4:4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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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스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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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동안거 해제 때였다. 몽술(夢述) 행자가 만공 노스님께 나아가 절을 하니, 물었다.
“네가 누구냐?”
“몽술이라 합니다.”
“이 곳에 무슨 일로 왔느냐?”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왔습니다.”
“법문을 어디로 듣느냐?”
“귀로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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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5 오후 5:1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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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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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한가로이 앉아있을 때, 진성 시자가 차(茶)를 달여 가지고 왔다.
스님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않고 한가로이 앉아있는 내게(我今不勞而閑坐), 왜 이렇게 차를 대접하는고?”시자가 한 걸음 다가서며,
“노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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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0 오후 5:3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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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스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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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공(滿空;1871∼1946)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가 왔는데, 내용은 이랬다.
“시방세계가 적멸궁(寂滅宮) 속에 건립되었다 하는데, 그 적멸궁은 어느 곳에 건립되었습니까?”
만공 선사가 답했다. “시방세계는 적멸궁에 건립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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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오전 11:2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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