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승려 사토(佐藤泰舞)는 우리 불교계를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한암(漢巖·1876∼1951) 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한암 선사는 곁에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올렸다.
다시 사토 스님이 물었다. “스님이 모든 경전과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아 오는 가운데, 어디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한암 선사는 사토 스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참배나 다녀오너라.”
다시 사토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수도하였는데,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모르겠노라”
이때 사토 스님은 일어나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활구(活句)의 법문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암 선사가 말했다.
“활구라 해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고 말았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인가?’라는 사토 스님의 질문에 한암 선사는 무심히 곁에 놓여있던 안경집을 들어보였다. “불법의 대의가 저 멀리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눈앞에 있네”라는 뜻이 아닐까. <중용>에 “도야자(道也者)는 불가수유리야(不可須臾離也)니 가리(可離)면 비도야(非道也)니라”는 말이 있듯이, 불법(道)은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으며, 떠나 있다면 이미 불법이 아닌 것이다.
경전과 어록에서 가장 감명 깊은 부분을 묻는 질문에, 한암 선사는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라”고 경책한다. “불법의 정수를 어찌 문자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적멸보궁에 참배하고 새롭게 발심한 뒤 직접 문자와 언어가 끊어진 적멸(寂滅)의 경지를 체험하라”는 멋진 대답이다.
이어 한암 선사는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를 묻는 질문에, “모르겠노라”라고 답한다. 수행 상에 나타나는 경계는 어디까지나 경계일 뿐이다. 어떤 신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고 가기에, 기억에 남는 좋고 나쁜 경계가 따로 있을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토 스님이 활구 법문에 대해 감사를 표하자, 한암 선사는 끝까지 자비를 아끼지 않는다. “입을 열고 생각을 움직이면 벌써 그르쳤느니라(開口卽錯 動念卽乖). 죽은 말(死句) 그만하고 참구나 하거라” 하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처럼 한암 선사는 고인들의 선문답을 흉내 내어 읊조리는 ‘구두선(口頭禪)’, ‘앵무새선’을 크게 경계하였다.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의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27년 동안 동구 밖을 나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암 선사의 이런 경책을 받고 크게 감명을 받은 사토 스님은, 어느 강연회에서 “한암 스님은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도인임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둘도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상원사에는 선사를 친견하려는 일본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