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어느 날, 한암(漢巖, 1876∼1951) 스님이 상원사에 주석할 때의 선화다.
월정사 종무소에서 전갈이 오길, 일본 조동종 관장(종정)을 지낸 경성제국대학 사토 타이준(佐藤泰舞) 교수가 면회를 요청하니 곧 내려오시라는 것이었다. 그 때 상원사에서는 한암 조실의 지휘 아래 가을 김장 준비로 밭갈이 중이어서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 후 사토 교수 일행이 직접 상원사로 올라오자, 통역이 작업을 중지하고 귀빈을 맞으라고 성화였다. 통역이 다시 조르자 한암 스님이 말했다.
“가서 물어보게. 나를 찾아보러 왔는지, 절 받으러 왔는지.”
이윽고 시자방으로 들어온 사토 교수는 공손히 예배하고 법문답을 청했다.
“본연청정(本然淸淨)한데 어찌 산하대지(山河大地)입니까?”
한암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문을 활짝 열고 청산(靑山)을 보여주었다.
이 선문답은 장수(長水) 선사와 낭야(廊揶, 991~1067) 선사간의 문답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한 공안이다.
장수 선사가 낭야 선사에게 가서 묻되, <능엄경> 가운데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묻기를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淸淨本然 云何忽生 山河大地)?” 한 질문을 인용하여, 다시 “청정본연커니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낭야 선사가 반문하되,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는고?” 하였더니, 장수 선사가 언하에 깨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수 선사가 물을 것도 없는 것에 한 생각을 공연히 일으켜서 ‘묻는 그 자체가 산하대지를 나타나게 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장수 선사와 사토 교수의 질문은 동일했지만, 한암 스님은 ‘만목청산(滿目靑山: 보이는 그대로가 진리인 세계) 즉, 산하대지를 직접 보여주는 말없는 지혜작용으로 오히려 낭야 선사 보다 더욱 명쾌한 대답을 하고 있다.
본래 청정한 법신(法身)에서 어찌하여 무명(無明)이 일어나 산하대지의 세계와 중생이 생겼느냐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는 미혹한 눈으로 보면 세계가 더러운 곳으로, 중생이 악의 덩어리로 보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세계가 유리(琉璃) 세계로, 중생이 부처로 보인다고 한다. 법계가 본래 청정한 것을 깨닫고, 또 깨닫지 못한 차이로 달라 보인다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에 대해 <능엄경>에서는 본래 깨친 성각(性覺)이 망념으로 인하여 본연청정한 것을 가리고 지, 수, 화, 풍, 공, 견, 식(地水火風空見識)의 7대 만법이 연기되어서 무기물의 세계와 생명계의 중생이 생겼다고 본다.
즉, 부처님께서는 “무명의 망념으로 인하여 세계도 생기고 중생도 생기고 기타 만물이 생겼느니라”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종에서는 단적으로 “한 생각이 쉬면 본연청정한 세계요, 선악으로 나누는 한 생각이 일어나면 오탁악세다” 라고 말한다.
즉, “다만 한 생각의 차이로 인하여 만 가지의 형상이 나타났다(只因一念差 顯出萬般形)”는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