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한가로이 앉아있을 때, 진성 시자가 차(茶)를 달여 가지고 왔다.
스님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않고 한가로이 앉아있는 내게(我今不勞而閑坐), 왜 이렇게 차를 대접하는고?”시자가 한 걸음 다가서며,
“노스님! 한 잔 더 잡수십시오” 하였다.
스님이 “허! 허?” 하고 웃었다. 이 문답은 유명한 조주 선사의 ‘끽다거(喫茶去: 차 드세요)’ 공안의 한국판이라 할만하다.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등장한다. 한 수좌가 절에 도착하자, 조주 선사가 물었다.
“여기에 처음 왔는가, 아니면 온 적이 있는가?”
“온 적이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조주 스님이 또 다른 수좌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그가 “온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조주 선사는 또 “차나 들게” 라고 하였다.
뒤에 원주(院主) 스님이 의심이 나서 조주 스님께 물었다.
“왜 온 적이 있다 해도 차를 마시라 하고, 온 적이 없다 해도 차를 마시라고 했습니까?”
“자네도 차나 한 잔 마시게.”
이처럼 조주 선사는 세 명의 스님에게 똑같이 “차나 들게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사가 상대적인 분별의식을 끊은 깨달음의 절대경지에서, 이리 저리 찾고 구하는 치구심(馳驅心)을 내려놓도록 이끄는 법문이다.
이 절, 저 절 찾아다니며 불법(佛法)이 무엇이고, 선(禪)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헤매는 망상과 집착을 맑은 찻물로 씻는 시원한 화두인 것이다.
만공 스님이 차를 마시면서, ‘끽다거’ 공안을 화제(話題)로 제자의 기량을 시험하자, 진성 시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 잔 더 잡수십시오”라고 응대한다.
‘끽다거’ 화두에 대해 요리조리 알음알이를 내어 대답하는 순간, 한 잔의 차는 어느 순간 독주(毒酒)가 되고 만다. 물론 조주 스님의 대답을 앵무새처럼 흉내 낸다면 더욱 어긋나고 만다. 찻자리에서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주고받음 없이 차를 올리고 받는 무심(無心)의 거래(去來)가 아니고서는 이런 자연스러운 응대가 즉각적으로(생각의 개입 없이)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이 문답에는 ‘끽다거’ 공안과 함께 ‘일없이 한가한 도인(無事閑道人)’의 경지가 어떤 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숨어있다. 만공 스님은 스스로 ‘일도 없이 한가로이 앉아있는(不勞而閑坐)’ 무사인(無事人)임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행여나 말 따라 가서 ‘빈둥빈둥 노는 노인네’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임제 선사가, “구하는 마음을 쉬면 바로 무사(無事)”라고 했듯이, ‘밖을 향해 구하는 마음(치구심)’이 없는 것을 ‘무사’라고 한다.
‘무사’는 적정의 경지이며 본래 진실한 자기(眞己)로 돌아가서 평안한 마음상태인 것이다. 사실, ‘치구심’을 없애는 것이 부처(본래 순수한 참 자기)를 자각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무사(無事)가 바로 귀인이다. 밖으로 구하지 말라. 다만 조작하지만 말라”(임제록)고 했던 것이다. 깨달음을 구하고, 원하고, 바라는 ‘최후의 갈망’마저 쉬는 것이 참된 수행이 아닐까.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