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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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스님(5)
1939년 동안거 해제 때였다. 몽술(夢述) 행자가 만공 노스님께 나아가 절을 하니, 물었다.
“네가 누구냐?”
“몽술이라 합니다.”
“이 곳에 무슨 일로 왔느냐?”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왔습니다.”
“법문을 어디로 듣느냐?”
“귀로 듣습니다.”
“귀로 들으면 잘못 듣는 법문이니라.”
“그렇다면 어디로 듣습니까?”
하니, 노스님이 쥐고 있던 주장자로 행자의 머리를 한 번 ‘딱!’ 때리고 묻기를 “알았느냐?”하고, 다시 한 번 더 때릴 기세로 주장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알았다 하여도 이 주장자를 면치 못할 것이고, 알지 못하였다 하여도 이 주장자를 면치 못하리라. 속히 일러라.”
행자가 머리를 만지며, “아야! 아야!”하니, 스님은 주장자를 내리고 박장대소(拍掌大笑)하였다.
몽술 행자는 훗날 만공 스님의 선문답에 사미나 시자로 자주 등장하는 진성(眞性, 혹은 眞惺) 스님이다. 이 문답은 하룻강아지처럼 물정(物情) 모르는 행자가 덕숭산의 호랑이를 놀린 격이지만, 만공 스님은 오히려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있다. 막 절에 들어온 어린 행자가 알고 모르고 하는 분별심을 떠나, “아야! 아야!” 하는 무심의 지혜작용을 드러낼 줄 아는 법기(法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문답에서 만공 스님은 법문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듣는다는 말인가? 흔히 ‘마음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법의 비’를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한다. 마음 땅에 뿌려진 불법의 씨앗을 싹틔우기 위해서는 학인의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만 선지식의 ‘마음 법문’이 진실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남악회양 스님은 마조 스님의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마조록)고 답했다.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실제로 온갖 고정관념과 사량분별,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이 진리의 말씀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마조 스님은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法性)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마조록)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진리의 법문을 바로 듣기 위해서는 개념과 분별심에 걸리지 않고 텅빈 마음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성철 스님은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른 바 ‘무정물의 설법(無情說法)’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말이 아닌 주변의 풍경이나 사물이 드러내는 진실을 ‘무정설법’이라 한다. 그것은 의식으로 조작해서는 알 수 없는 진실의 세계이다. 쓸데없는 망상과 분별의식, 일체 관념이 사라졌을 때, 있는 그대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선(禪)의 세계인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7-07-25 오후 5: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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