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만주 왕청의 토굴에서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던 청담(靑潭, 1902~1911) 스님이 주먹밥과 짚신을 받아들고 수월 스님에게 마지막 절을 올렸다.
그러자 수월 스님은 갑자기 청담에게 곳간에 가서 괭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괭이를 가져오자 수월 스님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마당에 박혀 있는 돌멩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돌멩이입니다.”
청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월 스님은 괭이를 빼앗아 들더니 돌멩이를 홱 쳐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들판으로 나갔다.
청담 스님은 수월 스님에게서 받은 이 공안을 일생 동안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이 공안은 수월 스님이 청담에게 준 가르침이기에 앞서, 당신이 세상에 내어 보인 마지막 법문이었다. 그로부터 한 해가 못 되어 수월 스님은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청담 스님은 수월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만주 땅으로 구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당시 수월 스님은 보림공부의 일환으로 짚신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보살행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신발이 떨어지면 수월 스님을 찾아가 짚신을 얻곤 했다. 스님은 농부나 독립군은 물론, 도둑이나 산적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짚신을 나눠준 까닭이다.
당시, 만주의 마을에서 기르던 ‘만주개’는 몹시 사나웠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서면 떼로 달려들어 물어 죽일 정도였다. 그래서 밤길을 다니는 것은 금기였다. 하지만 수월 스님은 예외였다. 그가 나타나면 개 수십 마리가 무릎을 꿇고 반겼다. 까치, 꿩, 노루, 토끼 같은 산짐승, 날짐승도 모여들어 스님에게 응석을 부리는 듯 했다.
하루는 이런 광경을 본 청담 스님이 짐승들이 자기를 보고 도망가는 이유를 묻자, 수월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아직 살생심이 남아 있어 그러는 것일세.”
“스님, 어찌하면 살생심을 없앨 수 있습니까?”
“자비심을 기르게나.”
“어찌 하면 자비심을 기를 수 있습니까?”
“자네와 (짐승이)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이후 청담 스님은 누가 욕을 해도 미소를 짓는 자비ㆍ인욕(忍辱)공부를 하여 ‘인욕보살’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면서도 늘 하심할 수 있었던 것은 수월 스님의 감화 때문이었으리라.
위의 공안에서 수월 스님은 청담에게 “돌멩이를 돌멩이라 부르지 말고 일러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청담은 그 질문이 공안인 줄 모르고 무심코 돌멩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수월 스님은 돌멩이를 캐내어 던져버린다.
청담은 돌멩이를 마음으로 볼 줄 모르고 대상으로만 본 탓에 돌멩이란 말과 개념에 갇혀버린 셈이다.
수월 스님은 언어와 생각의 틀을 송두리 때 뽑아 던져버리는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써, 먼 길 떠나는 젊음 수좌를 위해 마지막 공부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이런 노스님의 간절한 가르침 덕분에 청담은 도(道)와 덕(德)을 갖춘 당대의 고승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