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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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1)
1899년 경허 스님은 가야산 해인사 북서쪽 20km 지점에 위치한 수도산의 청암사 수도암에서 머물렀다.
그때 26세의 한암 스님은 51세의 경허 스님을 처음 만난다. 이곳에서 한암 스님은 경허 스님의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 있는 것이 형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금강경> 4구게 법문을 듣고 안광(眼光)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눈에 우주 전체가 환희 들여다보이는 체험을 한다. 얼마 뒤 수도암에서 몇몇 수좌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경허 스님이 일동에게 질문했다.
“어떤 수좌가 ‘어떤 것이 참으로 구하고 참으로 깨닫는 소식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운문이 ‘남산에 구름이 이니 북산에 비가 온다(南山雲起 北山下雨)’고 답했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한암 스님이 대답했다. “창문을 열고 앉으니, ‘기와를 입힌 담(瓦墻)’이 앞에 있습니다.”
경허 스님은 그 다음 날 법상에서 여러 수좌들을 보고 말했다. “중원(重遠: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 지혜가 열림)을 넘어섰다.”
‘남산에 구름’ 공안이 나온 원래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옛 부처(古佛)와 법당의 기둥(露柱)이 서로 교섭하는데 이게 무슨 작용인가?”
아무도 대답하는 이 없자, 운문 스님이 스스로 말했다. “남산에 구름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온다.”
이 공안에서 ‘고불(古佛)’은 오래 묵은 불상이요, ‘노주(露柱)’는 법당 앞의 돌기둥이니, 모두 만 가지 법(法)의 하나이다. 동시에 고불은 본래부터 부처인 각자의 자성(自性), 즉 자각의 주체인 불심을, 돌기둥은 현상 경계의 사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론 ‘옛 부처’를 성인으로, ‘돌기둥’을 범부로 볼 수도 있다.
고불과 노주가 교섭하는 작용을 알기 위해서는 주관(心)과 객관(境), 부처와 중생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작용하는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不二不一)’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를 요달해야 한다. 이러쿵저러쿵 하는 문자풀이로는 알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언어와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비롯한 일체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한 경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산과 북산이란 서로 다른 공간, 구름 일고 비 내리는 시간적인 전후를 초월하여 묘한 작용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사량분별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ㆍ공간인 색(色)의 세계와 다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공이 그대로 색이요, 색이 그대로 공인 것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래서 한암 스님은 “창문을 열면 담장이 보인다”며,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山是山 水是水)’인 소식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불과 노주, 남산의 구름, 북산의 비는 물론 눈앞의 담장 역시 우리 눈에는 역력한 것이지만, 모두 자체성이 없이 연기(緣起)되어 나타난 현상이기에, ‘토끼 뿔’, ‘거북 털’처럼 공한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7-08-29 오후 4: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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