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프로야구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사람들은 경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선수나 팀은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준비하고 최선의 경기를 다짐하지만 승패는 의외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응원하던 사람들도 희비가 달라진다. 열심히 준비하지만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상(常)이 아닌 무상(無常)이라 해본다.
합격이라는 결과를 위해 한 해 혹은 여러 해 준비했던 시험이지만, 반드시 통과하지는 않는다. ‘변수’라는 것이 있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좋은 결실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지만 결과가 달라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덧없음’이라는 무상의 뜻을 떠올리지 못하는 우리의 습성 때문이다. 이것이 중생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인과를 다르게 보는 보살의 안목이 필요하다. 부처님 말씀은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중생들이 상상하거나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삼법인을 말하지 않더라도 덧없이 변화하는 이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중생들의 내면에 잠재한 탐심은 결과에 집착하기에 세상은 고해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유마거사는 문병하러 온 석존의 제자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소승적 생각을 벗어나라고. <무문관> 내용에서 운문 스님은 생사에 얽매여 있는 대중들을 향해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 보이는 시범을 했다. 천편일률적 사고와 생활을 질타한 것이다. <법화경> 후반부가 시작되면서 석존은 태자로 있던 카필라성을 나와 가야성 가까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것은 방편이었음을 선언한다. 땅 속에서 솟아오른 지용보살들도 과거 자신이 제도했다고 하여 영산 대중들을 놀라게 하였다. 멸도라는 말에 얽매이지말고, 영원한 법신을 믿으라는 발상의 전환을 가르쳤다.
발상의 전환은 <반야심경>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인 오온설, 사성제설, 12연기설, 12처설 등을 낱말풀이와 같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無)’로써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 해야 함을 강조한다. ‘무’가 갖는 의미는 관행적, 교과서적 시각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를 아는 지혜를 갖추라는 말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 혹은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가 뜻하는 것은 모두 명확한 결과를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살이에서 명확하지 않은 결과들이 더욱 많다. 그래서 세상이 고해의 예토로 보이는 것이다. 같은 인과를 두고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과 성인의 경지인 불보살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중생이 물건과 결과에 집착할 때, 불보살은 법공(法空)임을 본다. 그래서 보살은 고에서 벗어났으며, 두려움이 없고, 어긋나지 않는다고 <반야심경>은 설한다. 삼세의 부처님들도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에 위없는 보리를 얻는다고 하였다.
결실의 계절에 중생의 집착이 아닌 보살의 무기인 공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요구된다.
최동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