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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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조성 소득 '쑥쑥' "절은 마을의 큰집이에요"
29. 불갑산 불갑사

불갑사로 향하는 길에서 비를 만났다. 비가 그려내는 수채화는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젖은 나뭇잎이 은전처럼 찰랑찰랑 흔들어 댄다. 다소곳하게 자신을 내주고 있는 풍경들에게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다. 비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만 바람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라고 채근하는 듯하다. 아랫마을 모악리를 지나 절집으로 향하는 길가에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않는 성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문득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는 불갑산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곳은 이념의 벽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다 쓰러져 간 젊은이들이 피 바다를 이룬 지역이다. 이름도 없이 쓰러져간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꽃무릇이 피어난 것은 아닐까. 산자락이 붉은 꽃물로 흥건히 젖어 있다. 묘비명 같은 상사화를 보며 묵념을 올려본다.

불갑사는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마라난타존자가 남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1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창건하였다. 해동고승전에 최초로 창건한 사찰이 모악산 불갑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후기 각진 국사가 크게 중창하여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고 사전이 십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천년고찰 불갑사 대웅전은 조선중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830호로 지정되었고. 사천왕상은 지방문화재 159호이다. 불갑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절집이다. 불교의 ''불''자와 육십갑자의 으뜸인 ''갑''자를 한 글자씩 따서 불갑사라 이름 지었다.


수행은 자기 내면을 향해 걸어가는 긴 여정이다. 외롭고 고독한 인생길에 수행하는 심정으로 절집이 안고 살아가는 사하촌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악리는 3개부락에 54호 146명이 모여산다. 고령화시대에 들어서면서 마을은 노인들이 대부분이지만 기계화된 농사를 짓는 젊은 사람들이 입주를 하여 초등학생들도 있단다. 예전에는 영광의 오지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영광의 7대 관광지라고 최병대 이장님의 자랑이 늘어진다.

“모악리는 범죄가 없는 살기 좋은 마을입니다. 모두 불갑사 절 때문이지요. 앞으로 마을앞 도로도 3차선으로 놓을 예정이지요. 광주까지 30분 정도면 나가고 관광버스도 순회한다고 합니다. 법성포구, 백수해안도로, 원자력발전소, 저수지, 내산서원, 불갑사 등 볼만한 관광지가 많지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골 풍경처럼 절집도 문명의 속도를 읽고 있는 듯하다. 5년 전 불갑사에 들렀을 때 절집으로 통하는 길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순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문 안으로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되어 왠지 걸어야할 것만 같은 길이다. 넓은 주차장에 주차료도 안 받고 입장료를 받는 요금소도 없어서 일주문이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문 같다. 예나 지금이나 불갑사에는 산문 밖이나 안의 경계가 없다. 도솔천을 지나 절집으로 통하는 길은 산란하고 불안한 마음도 다 내려놓으라고 유도한다.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하고 돌계단을 올라서니 천왕문이 지극한 합장을 하고 맞이한다. 포근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절집이다.


불갑사 일주문 안에 관광공원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불갑사 만당 스님의 역할이 컷다.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10% 정도 땅을 매입하고 나머지는 사찰이 땅을 내 놓았단다. 만당 스님은 지역주민들도 잘살게 하고 불갑사의 옛 명성도 되찾으려 애쓰고 있다.

절집 주소가 모악리 8번지인데 출장 떠난 스님에게 민방위 훈련이 떨어지면 이장님이 대신 국민의 의무를 져주기도 한단다. 그런가 하면 절집은 마을사람들에게 농외소득을 얻도록 도움을 준다. “올봄 꽃보기 관광지를 조성하여 논과 밭에 유채를 심었지요.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꽃도 보여주고, 음식도 팔았어요. 산골마을에 절집이 없으면 축제가 불가능하지요.”


이장님이 9월 20일 꽃무릇 축제를 놓고 주지스님을 찾았다. “불갑사가 마을의 큰집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네요”라는 질문에 스님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은 서로 상생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외따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찰과 사하촌이 괴리되어 있고는 존재의 의미가 없죠. 주민들도 사찰이 있음으로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삼을 수 있습니다. 사찰이 있는 골짜기와 없는 골짜기는 묘하게 느낌이 다릅니다. 산에 가면 절이 있어야 산 맛이 나고 절에는 스님이 있어야 절 맛이 납니다. 사찰이 지역주민과 호흡을 같이 할 때 제대로 빛이 나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갑사는 문화재 관람료와 주차요금을 받지 않는다. 만약에 매표를 하고 관광지로 발전하려는 욕심을 보이면 주민들과 거리감이 생기게 마련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각자 있는 자리에서 근본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불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영광에 핵 폐기장이 생긴다고 했을 때 절집이 적극적으로 나서 유치를 반대했단다. 영광을 아끼고 사랑하는 스님이라고 자랑이 끊이지 않는다. 사하촌에는 절집과 소통되는 오랜 문화를 계승해 오고 있다.“우리 마을은 음력 일월 십오일 새끼줄을 감아서 당산제를 지내지요. 당산나무할아버지와 수산할매가 있는데 할아버지에게는 새끼를 왼손을 꼬아서 금줄을 쳐줍니다. 수산할매는 줄을 드려서 남자와 여자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지요. 여자들에게 져주어야 풍년이 든다는 풍습이 있어 3번 싸움을 하면 여자들이 두 번 이기게 합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농악대들이 길놀이를 하며 수산할매바위에 줄을 감아 놓지요”

마을 사람들 정성 탓인지 장수하는 마을이고 효부가 많은 마을이란다. 이장님은 모악리의 야사를 들려주었다. “마을 앞으로 지나는 개울에 한물이 찰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어른들이 학교갈 때 업어서 강변을 건네주었지요. 비가 오면 나무다리가 자주 떠내려갔어요. 나무가 귀하던 시절인데도 불갑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다리를 놓으며 살았지요. 땔나무가 없을 때도 불갑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때며 살았어요. 스님들은 중생들이 필요하면 뭐든지 가져가라고 했는데 산림조합에서 나와 벌금을 물리고 그랬지요.”

지금도 땅이 없는 마을사람들은 절집 산에 묘를 쓴다. 그러나 절집에서 말리는 일은 없단다. 마을 사람들은 불갑사가 잘되어야 마을이 잘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하촌 사람들은 모시잎 송편을 향토음식으로 개발하려고 한다. 절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맛을 보였는데 인기가 있단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연산 뽕잎을 따다가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면 쌀도 소비가 되어 일거양득이란다. 브랜드 효과를 얻어내려는 마을 사람들 계획안을 듣고 주지스님은 절집 땅 삼천평을 내놓을 테니 마을의 소득을 올리는데 사용하라고 했다. 눈이 맑은 만당 스님은 불감정각(不取正覺)을 마음 한 복판에 새겨두고 사는 것 아닐까.

Tip-꽃무릇 볼 만한 길
꽃무릇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대웅전 뒤편 저수지를 지나 동백골-구수재-불영대-연실봉-해불암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다. 저수지 옆에 핀 꽃무릇군락과 동백골에서 구수재로 가는 중간 불영대 주변에 볼거리가 많다. 신선한 가을 산행도 즐기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참식나무군락의 빨간 열매로 가을 느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영광=김상미(수필가 본지 객원기자) |
2007-09-27 오전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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