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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서 칼럼] 국내외 과도한 선교활동 제한 법제화 필요
29. 아프간의 교훈
두 명의 선교활동가의 희생과 함께 온 국민을 불안하게 했던 탈레반 피랍 사태가 종결되었다. 그런데 뒷맛이 씁쓸하고 마음이 착잡하다. 이 사건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리라.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의 무분별한 해외선교, 정부의 미숙한 대처, 그리고 구상권 청구 논란 등 세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 개신교의 무모한 선교전략이다. ‘타문화와 타종교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을 선교성과로 자랑스럽게 내세워왔던 한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이 이번 사태의 배경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신교인들의 무례한 전도행태에 대해 그동안 경고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그때마다 사회문제화 하지 못하고 관대했던 것이 오히려 내성을 키운 것 아니냐는 자조의 목소리도 있다. 이번 해외선교 소동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격언을 다시 상기시킨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개선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태가 종결되자마자 “잘못한 것 없다. 모든 게 신의 뜻이고 이번 석방도 기도에 응답한 하나님의 작품이다”라고 주장한다니 기가 찰 일이다. 두 사람의 죽음도 그들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죽은 이들 가족의 가슴에 또 한 번 못질을 해대고, 함께 정신적인 인질이 되어 심리적 고통을 당했던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선교파송 책임자인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한 술 더 떠 “이번 사태로 선교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3천 명의 배형규가 나와야 한다”며 선동적인 설교도 했고, 심지어 어느 피랍자의 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별별 소리를 다하며 떠들고 난리를 부리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진행시켜 나가시고 결과를 내실 것인지 기대가 크고, 속으로 신나고 재미있다”고 신앙간증을 했다니, 그 비이성적인 언행과 변절에 할 말을 잊는다.

‘사회와 소통이 안 되는 딴 세상 사람들’ 같은 일부 기독교인들과 ‘죽을지언정 개종은 없다’는 이슬람교인들이 부딪쳤으니 사고는 당연히 예견된 것이었다. 헌팅턴이 우려했던 ‘문명의 충돌’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둘째, 정부의 안이하고 무원칙한 대처다. 사상 초유의 피랍사태에서 그나마 이 정도 선에서 해결한 것을 잘했다고 국정원장이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것도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데, 몸값 지불설, 테러집단과의 협상불가라는 국제원칙 무시 등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긴 것은 더 큰 문제다.

이 사태의 여파로 아프간이 여행제한국에서 한 단계 높은 여행금지국이 됨에 따라 모든 걸 포기하고 귀국해야만 하는 아무 죄 없는 2백여 교민들과 순수 봉사자들은 어디서 보상을 받을 것인가. 더구나 이러한 정부의 직접 개입 선례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이 납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불안감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셋째, 국가와 개인의 관계 설정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된 ‘국가의 국민보호 책임의 한계’에 관한 근본적인 명제로서, 급한 상황에서 국가가 먼저 쓴 경비에 대해 원인제공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문제가 초점일 것이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라고 해서 생사의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할 수 있는가. 공무집행이나 순수 생업도 아닌데다가, 단순한 경솔 또는 실수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위험을 자초하는 경우마저 무한정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 특히 종교적 신념으로 선택한 모든 상황을 국가가 끝까지 지켜주어야 하나. 그로 인해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물적ㆍ정신적 피해는 누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국가가 극성스런 종교인들의 선교사업 뒤치다꺼리 하는 데 예산과 행정력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국가의 특정종교 지원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런 일에 함께 휘말리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국민의 90% 이상이 정부의 구상권 행사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더구나 이번 사태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자성은 잠깐 하는 척 하고 앞으로도 교묘히 눈속임하며 무리한 선교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신을 믿는 그들에겐 국가는 한낱 천국으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국가의 입장에서 신의 사업에 끼어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현실적으로 부당하며, 따라서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종교인들이 벌이는 구호 및 봉사활동이 말 그대로 ‘자랑거리’인 봉사인지, 아니면 ‘화근덩어리’인 선교인지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특히 국내외에서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선교활동의 제한 또는 금지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때다. 구체적인 법제화를 통해 국가와 개인 간의 책임과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또다시 국력을 낭비하고 국민 전체를 볼모로 온 나라를 마비시키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박광서 교수(서강대 물리학과) |
2007-09-19 오후 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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