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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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마을 맑은 소리만 가득하길
27. 희양산 봉암사

봉암사로 오르는 숲길은 호젓하고 고요하여 자연도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수행사찰이라 산문을 열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말리는 것이 절집의 인연법이라 하니 야속하다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어쩌면 한평생 적막과 싸워야만 하는 절집의 숙명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의 덧없음 속에 쌓인 절집의 적막은 스님들 독경소리가 깨우지만, 내 안에 쌓인 적막은 무엇으로 깨운단 말인가. 끝내 깨우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적막 속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는지.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 지증 대사가 창건했는데, 보물 제171호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적조탑, 보물 제169인 봉암사 삼층석탑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 절집이다. 희양산 자락을 지증 대사가 보고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의 띠 같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단다. 햇살이 하얀 바위벽에 부서져 벼랑 아래 법당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이 지혜가 없는 내가 봐도 명당인 듯하다. 봉암사도 다른 절집과 마찬가지로 중창과 소실을 반복했는데, 사세가 융성했을 때는 3000여 명의 스님들이 머물러 정진하였다고 한다. 스님들이 선방에 들고 난 후 적막이 너무 무거웠던지 극락전 추녀 끝에 걸린 풍경이 소리를 여의고 있다. 수행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도를 닦으라는 경책인 듯도 하다.


조계종 특별 선원으로 참선과 정진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봉암사는 성철 스님을 비롯한 선승들의 요람이었고 한국 불교의 중흥을 모색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때가 되면 선방은 스님들 정진의 언덕이 된다. 일주문부터 절 너머의 사찰림까지 주지스님의 허락 없이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사월초파일이나 칠월칠석날은 중생들을 위해 산문을 열어두기도 한다. 절을 돌아보는 동안 납옷을 입은 스님들을 만났는데 모두 고개를 숙인 굳은 표정들이다. 수행을 하는데 속가의 사람들 방문이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희양산의 솟은 바위의 모습은 북한산국립공원의 인수봉이나 설악산국립공원의 울산바위에 견줄 만하다. 거대한 바위 봉우리 아래에 골짜기마다 띄엄띄엄 마을이 있는데 원북리에는 현재 3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김학복 반장님을 만났다.


“우리 마을에는 대부분 65세 이상 노인들이 삽니다. 옛날에는 90호에 200명 이상 사는 큰 마을이었지요. 산골짜기에 화전민이 50호 정도 살았는데 박정희 대통령 때 모두 이전을 했습니다. 그동안 마을사람들은 약 2만6400평방미터 정도의 절집 농사를 지어주며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2년 전부터 도지를 주지 않고 있지요. 절집에서 1650평방미터당 1가마의 소작료를 받았는데 좀 더 생각해 달라고 요구를 했고 마을 사람들은 더 줄 수 없다며 팽팽한 줄 당기기를 하다가 결국 합의를 못 봤지요.”

원북리 아랫마을에서는 도지를 주면서 660평방미터당 쌀 한가마의 소작료로 받기 때문에 절집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사람 마음은 한번 구부러지면 펴기가 어려운 법인데 안타까웠다.

“우리 마을은 농로를 포장하지 못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마을앞 다리도 놓을 수가 없지요. 허가가 나지 않아요. 봉암사가 선수행 사찰이라 마을이 관광지로 개발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마을사람들이 마음 놓고 건너다닐 수 있는 다리는 놓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리가 너무 낮아서 비가 웬만큼 와도 산 밑 마을은 갇혀버린다고 했다. 냇가가 20미터 정도의 넓이라 다리를 놓아도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단다. 마을 사람들은 원북리 주민으로서 봉암사가 도로와 다리를 놓는 것에 앞장 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80년도 마을이 큰 수해를 입고 인명피해가 있었던 터라 다리 놓기가 주민들의 첫 번째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암사와 사하촌에는 서로 아픈 마음을 보듬어 주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며 꼬깃꼬깃 넣어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김만성 주지스님이 계셨어요. 한국전쟁 때 희양산에 빨치산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요. 봉암사를 지키기 위해 마을사람들은 하룻밤에 두 번 씩 올라가서 관찰하고 군에다 보고를 했지요. 그렇게 생명을 무릅쓰고 지켰는데 봉암사가 빚으로 개인에게 넘어갔어요. 무슨 일인지 김외덕 형사가 봉암사 주지가 되었지요. 문경시민들은 봉암사를 찾아서 조계종에 넘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군에 진정을 넣었어요. 그 때 이병하씨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절집을 도로 찾아준다는 공약을 내세워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이병하씨가 15일 법무부 장관을 하면서 봉암사를 찾아 주고 장관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때 개인에게 넘어가는 절집을 찾기 위해 행정서를 꾸미고 공약을 얻어내 봉암사를 찾아준 것이 마을사람들이었어요. 절집에서 그런 마을 사람들 마음을 헤아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원북리 사람들은 봉암사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종단이 위기에 있다고 판단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서는 봉암사의 힘을 믿고 싶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문제는 마을사람들에게도 있다고 했다. 마음을 한데모아 타협해야 하는데 적은 인원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잘 안 된단다. 몇 년 전 절집 땅에 마을회관을 짓는데 절집에서 100만원을 희사 하면서 절집 목수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방을 한 칸 달라고 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서먹서먹하게 되었다고 했단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손을 내밀면 언제나 절집은 가까이 있다.

“점촌발 가은행 버스가 마을에 들어오는데 버스비가 2800원 하는 차만 하루 21대가 들어옵니다. 1800원씩 하는 입석버스가 우리 마을에는 한 대도 배차가 되지 않아요. 아프면 병원비보다 차비가 비싸서 못 나갑니다. 다른 지역은 많이 다니는데 한 대도 안 보내주어 버스비가 부담이 되지요. 하루에 입석 10대만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꾸며 봉암사 주지스님께 협조를 요청을 했지요. 스님이 승낙하여 봉암사 주지스님과 노인회장님 이름으로 접수를 했습니다. 아마도 봉암사가 앞장서면 빨리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 큰 절과 이웃하고 있어서 원북리 사람들은 적막한 삶도 두렵지 않은 것 아닐까. 수평을 완벽하게 유지해야 맑은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절집과 사하촌이 수평을 유지하며 내는 맑은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문경=김상미 객원기자(수필가) |
2007-09-19 오전 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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