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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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찾는 관광객 늘어 마을 소득 '기대'
25. 금강산 건봉사
건봉사

건봉사는 주변 산들이 연화형국이라 스스로 성스러운 울림을 지니고 있다. 28년간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염불원을 찾아가는 내 귓전에, 독경하는 스님의 맑은 목소리와 목탁소리가 맴돌았다. 오랜만에 비 그친 산문 밖 풍경들은 때 묻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수행하고 있는 듯하였다. 벗겨진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살은 아직 여름더위를 걷어갈 생각이 없었다. 혹시 청아한 풍경소리가 바람을 몰고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경내로 오르는데, 그나마 꼬리를 감추지 않는 착한 길을 만나서 다행이다. 동행한 고성문화원 고문 윤용수 선생의 구수한 목소리가 감로수처럼 느껴져 마음으로 갈증을 덜어내고 건봉사를 둘러보았다.
조영암 스님의 흙집

“건봉사는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이 살아 있는 정토불교의 시발점입니다. 임진왜란 때 6천 여 명의 승병 훈련장이었고, 봉명학교와 봉림학교를 운영하며 신문화를 사하촌 사람들에게도 보급하였지요. 돈이 없는 아이들이 절집 돈으로 공부를 하고 완전한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졸업을 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요. 사찰이 번성했던 시기에는 3천여 칸의 가람이 있었어요. 세조의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왕실에서 토지와 산림을 하사해 주어서 건봉사가 크게 되었지요.”

절집은 시대를 건너오면서 여러 가지 이름을 갖기도 하였다. 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해 원각사, 도선 국사가 중수하여 서봉사, 공민왕 7년 나옹선사가 중수하고 건봉사라고 하였다.

법당 안에는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다. 당시 스리랑카에 3과, 우리나라에 12과가 있었는데 일본사람들이 강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찾아와서 건봉사 불사리탑에 모셨다. 1986년 문화재도굴단에게 모두 도굴 당했는데 범인이 자발적으로 8과를 돌려주었다.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나타나 후손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경고를 하는 바람에 마음을 돌렸단다. 3과는 탑에 봉안하고 5과는 금고에 봉안해 친견할 수 있도록 했다. 건봉사 불사리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민통선 통제구역에서 해제되고 복원불사가 진행되었다. 분명히 도굴행위는 악업인데 선업이 되어버린 셈이다.
불이문

금강저
산문 입구, 두 가지 마음을 품지 말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의미를 지닌 불이문을 통과했다. 4개 기둥에는 지혜의 칼이 새겨져 있다. 보물 중 유일하게 불이문이 무사한 것은 아마도 금강저가 전쟁 중에 지켰던 모양이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이후 1989년까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라 군승이 관리를 해오다 다시 복원되면서 문화관광지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능파교를 복원하면서 기단이 주저앉아 원래보다 좁게 복원되었어요. 사바세계의 고통을 불법으로 헤친다는 뜻을 지닌 능파교, 지금 기술로는 원래대로 복원이 불가능한 모양입니다. 유년시절 절집에 들를 때 스님들이 능파교를 건너 법당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일렬로 서서 능파교를 건너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참 처량해 보였어요. 승가의 법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적멸보궁으로 건너가기 전 이 연못에는 용하고 뱀이 같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요. 용과 뱀이 같이 살 수 없지 않습니까. 불가의 경전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라는 의미지요. 다리를 건너면서 적대심을 버리고 화합한 모습으로 부처님 앞에 가라는 뜻이지요.
능파교와 누각

또한 신라 발징 스님이 28년 동안 쉬지 않고 아미타불기도를 올리는 만일염불회를 주최하였다고 해요. 기도가 끝나는 날 기도에 동참했던 모든 이들이 극락세계로 승천하였답니다. 그 전통을 이어 만일염불을 실천하자는 운동이 건봉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지요.”

건봉사는 전쟁 말에 인민군이 후퇴하다가 오대산 능선을 타고 건봉사에 집결을 하였던 장소다. 신고가 들어와서 폭격을 하였는데 인민군이 떠난 후였단다. 아마도 떠나지 않았을 때 폭격을 했다면 영혼의 울음바다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폭격으로 가람과 국보급 보물들이 소실되어 포교기능을 잃었다. 다시 절집이 복원되고 불자들과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또랑또랑한 개울물소리로 더위를 씻고 돌 솟대에 앉아 있는 봉황에 대하여 묻는 내게 윤용수 선생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건봉사에 두 번 불이 났는데 높은 곳에서 오리가 놀고 있으면 그 아래는 물이 채워져 있는 것이므로 화재 방지책이 됩니다. 그래서 오리라고 보기도 하지요. 건봉사 범종을 복원하는 날 오색이 무지개보다 선명하게 하늘에 드리워져 사람들이 신기하여 쳐다보았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고 입을 모았지요.”

건봉다시마장식품이라 쓰여진 마을입구 기둥
옛날 건봉사 사하촌은 거진읍 냉천리로 물이 차고 좋기로 유명했다. 마을에는 스님의 속가와 여관업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막걸리도가도 있었다. 여관은 주로 자식을 못 낳아 절집에 불공을 드리러 오는 손님을 받아 장사를 했는데,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보시를 했단다. 절문 밖이라 불자들이 술을 마실 수 있어 승과 속이 구별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냉천 막걸리는 지역의 곡주로 유명하였다.

해상1리는 32호 주민이 어울렁더울렁 산다. 골재채취를 하는 석산에 가서 일을 하거나, 더러는 농사를 지어 부대에다 채소를 납품하여 소득을 올리고, 소를 키워서 아이들 학비에 보태며 부지런히 살았던 옛날이야기를 김부영씨가 들려주었다.

“우리 마을은 음력 정월 초이렛날 산신제를 지내고 있어요. 제주가 되는 집은 미리 소나무가지로 표시로 해두어서 마을 사람들 발길을 끊지요. 건봉산에 조그마한 사당이 있는데 남자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내려와 제물로 하루 종일 동네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농번기가 끝나면 떡과 음식을 해가지고 들에 나가서 하루 종일 먹고 놀다 해거름에 집으로 들어오는 질놀이를 즐겼습니다. 농부들의 공휴일인 셈이죠. 옛날에는 농사도 품앗이로 서로 어울려 지었는데 기계화가 되다보니 내 농사짓기에도 바쁩니다.”

그래도 마을회관에는 항상 어른들이 모인다. 메밀국수를 눌러먹기도 하고, 미꾸라지를 잡는 날에는 추어탕을 끓여 동네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조용한 산골마을에 건봉사 관광객들이 드나들면서 마을 사람들은 관광 소득 올리기를 원하고 있다. 절집과 사하촌이 그동안 미뤄 두었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문을 열어두고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였다.

사하촌 해상리 건봉다시마장식품 손재화 부녀회장
건봉다시마장식품의 손재화 부녀회장
사하촌 해상리는 “건봉다시마장식품”을 공동 운영하며 마을 아주머니들의 꿈이 된장 고추장처럼 곰삭아가고 있다. 적은 농가소득을 높일 수 없을까 생각하다, 농사지은 콩과 바다에서 채취한 자연산 다시마를 첨가해 전통장을 만들어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로 콩을 끓여 메주를 만든다. 황토발효실에서 발효를 시킨 메주로 전통장을 담그는데 더 깊은 맛을 내기 때문이란다. 항아리에 담긴 장은 건봉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맑은 햇살을 받아 아주머니들의 손맛을 우려낸다. 상품화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손재화 부녀회장은 말했다.

“전통장은 공장제품과 비교할 때 좀 짭니다. 짜다고 해서 싱겁게 했는데 처음에 맛이 있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신맛이 돌아 팔지도 못하고 모두 버렸지요. 실험을 했더니 전통장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장보다 염도가 낮았어요. 첨가제를 넣지 않기 때문에 짜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집에서 먹는 장맛 그대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개울물이 불어 마을이 하얗게 쓸고 지나갔지요. 장항아리도 다 쓸어가 버렸지만 조금 남은 장을 팔아서 다시 독을 샀습니다. 별 수입은 없지만 계속하다보니까 단골 고객도 생겼어요.”
전통장이 익어가는 장독대

하루 종일 햇볕이 들고 공기가 맑아 해상리는 장을 숙성시키기에 좋은 환경이란다. 소득이 없는 일에 7년 동안 매달리는 마을 사람들 성실성을 인정하였는지, 군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전통장만들기체험장과 홍보전시판매장을 지어주었다. 절집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군부대 면회객들이 쉼터로 이용할 수 있도록 원두막 정자와 대형주차장도 만들었다. 해상리 마을사람들은 장맛이 전국에 퍼져 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전통장은 고가로 팔지 않으면 마진이 남지 않지만 사하촌 사람들은 마을에서 생산하는 콩을 가공하여 판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에 맞춰 전통 장 담그기 축제를 개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올 가을 부터는 바다 심층수로 장을 담그는데, 장 담그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춰 놓았단다. 봄철과 가을철 15명 이상 인원을 받는데 점심은 보리밥으로 대접한다. 도시사람들이 체험하러 와서 장을 담가 놓았다가 장이 익으면 가져다가 먹을 수가 있다. 사하촌 사람들이 친정을 잃어버린 도시 사람들에게 친정을 선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아주머니들의 바람은 고성군내 학교 급식소에 저렴한 가격으로 납품을 하여 건강한 음식을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먹이고 싶단다.
고성=김상미(수필가 본지객원기자) | jygang@buddhapia.com
2007-08-24 오후 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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