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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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子'같은 관계 계속 이어지길…
23.설악산 신흥사
간간히 내리는 빗속에 설악산은 하얀 구름옷을 입었다 벗기를 반복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람의 흐름 따라 구름을 덧칠하며 진경산수화를 그리고 있었다. 흑백과 컬러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담백하다. ‘검은 색이라 우습게 여기지 마라''고 말하려는 듯, 회색 하늘에 어두움을 차용하여 풍광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세상에 흑색과 백색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색상은 없는 것 같다.

천둥과 번개가 하늘의 무거움을 폭로하더니 금세 빗줄기가 빗금을 그으며 절집을 가둔다. 요사채 처마 밑에 앉아 낙숫물 소리에 귀를 씻으며 촉촉하게 젖어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유년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외갓집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울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지붕에 매달린 빗방울이 눈물방울로 변하더니 마음 밭에 똑똑 떨어진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이치 아니던가. 정 따라 살아온 삶이 내게는 수행의 시간이었다.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을 쌓은 신흥사는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인연을 받아들이되 집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라 진덕여왕 6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 라고 하였고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에 세워져 46년간 불보시를 하다가 효소왕 7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의상조사가 내원암터에 다시 중건하여 선정사라고 개칭 하였고, 수많은 선승들이 수도 정진하는 절집이었지만 인조 20년 다시 화마가 휩쓸어갔다. 모두들 떠나갔지만 영서, 혜원, 연옥 스님은 중창불사를 위하여 기도에만 정진하였다. 어진 마음을 부처님이 굽어보았던지, 백발신인이 나타나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 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신이 길지를 점지해 주어 흥왕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건봉사가 전쟁으로 전소되어 영북지방 본산 기능이 마비되자 고암, 성준 두 스님 원력으로 신흥사를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였다.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불사를 하고 있다. 속초노인복지관을 개관하여 지역사회 복지에 참여하고, 춘천 불교방송지국을 개국하여 포교에 전념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는 의미로 신흥사(新興寺)의 귀신 신자(神字)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字)로 고쳐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신흥사의 변모를 사하촌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궁금하던 차에 설악동에서 최진순 씨를 만났다. “예전에는 설악산 소공원 안에 신흥사 소유의 땅에 사하촌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문성균 주지스님이 계셨을 때만해도 신흥사는 동네를 다스리는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지요. 초등학교 다닐 때 과일이 숙성될 무렵 태풍이 지나갔어요. 나는 고민하는 아버지를 보고서 떨어진 낙과를 들고 신흥사에 찾아갔지요. 큰스님을 뵙고 낙과를 보여주며 어렵게 되었으니 도지를 낼 수가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당시 큰스님이 ‘허허’ 웃으시며 관리스님에게 ‘과수원 최영감네 도지 2년만 받지 마라’ 는 답을 얻어 가지고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도지를 콩이나 잡곡으로 냈는데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탕감을 해주기도 했지요. 웬일인지 지금은 사하촌과 절집이 옛날처럼 자연스럽고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합니다.”

사하촌은 암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와 같았다. 상가 160여 호가 있는데 장사를 하는 집은 50호 밖에 안 된단다. 사하촌 문화에 대해 묻자 당장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데 무슨 문화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예전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여 신흥사로 오르는 외길은 하루 종일 몸살을 앓았는데 차도 뜸하고 주차장도 텅 비어 있다.

제주도로 떠나는 관광객 발길을 돌리기 위해서는 사하촌과 절집이 마음을 합쳐야 된다며 주민들이 청사진을 내놓았다. “설악관광호텔자리는 템플스테이 숙소로 이용하고, 사하촌에 불교문화의 기능을 살려야 합니다. 신흥사에서 첫날 여장을 풀고 이튿날은 참선의 날로 정하여 마음의 짐을 벗고 다음날은 고행의 날로 정해 만해가 직접 걸었다는 금강굴에서 마득령으로 해서 오세암으로 빠져 백담까지 만해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면 자연스럽게 사하촌 경제도 풀리게 된다아닙니까.”

“설악동 상권이 죽은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관광지 1호 만들고자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그 때 사하촌을 ABCDEF지구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B지구는 고급호텔이나 펜션지구로 개발하고 C지구는 미니콘도형 자연친화적인 단지로 개발하고 D지구는 민박형 저가 숙소 형태로 차별화를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체험거리 볼거리 지역으로 미니 스키장을 유치하는 것도 좋겠지요. 설악산을 등반하고 편안한 시설에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자연과 음악과 만남, 또는 자연과 과학의 만남 등 개별화된 프로그램도 필요하지요.”

암은 고질병이라 쉽게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암주사 같은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설악동은 상수원보호지역, 자연공원법 집단시설지구 등 족쇄로 묶여 숨통이 막힌다고 했다. 사찰과 국립고원은 서로 절충하며 시대에 맞게 변하고 있지만 사하촌은 아무 것도 움직일 수가 없단다. 얼마 전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 한국정신연구원, 신흥사가 머리를 모으고 간담회를 열었는데 주민들은 금강산에는 투자를 하면서 설악산은 이대로 두어서 되겠느냐고 쓴 소리를 했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살기 좋은 동네였습니다. 대불 옆자리에 부도 밭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숨바꼭질하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 어렵게 살지 않아서 그랬는지 사하촌 사람들 인심도 넉넉했어요. 명절 때 속초 사람들은 보리떡을 해먹었는데 설악동 사람들은 쌀떡을 해먹었지요. IMF가 지나가고 난 후 도산위기에 놓인 경매 물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2015년 까지 계발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빨리 응급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권금성만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를 토왕성계곡과 천불동계곡으로 연결하여 차별화된 관광 상품으로 내 놓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설악동 산악구조대원 최진순씨
설악지형 잘 아는 심마니로 구성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조난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훈련을 하다가 밤에 눈사태로 인하여 사고를 당했지요. 그 후 설악동에서 심마니를 하면서 발이 빠른 사람들이 민간인구조대를 만들었습니다. 등반 기술보다는 설악산 지형을 잘 아는 사람들이 구조대가 되었어요. 셀마 태풍 때 물이 갑자기 범람을 하면서 비선대에 등산객들이 갇혔지요. 비가 많이 오면 설악산은 물과 함께 바위가 구릅니다. 비를 맞아 체온이 떨어지면 죽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구조를 하고 요원들 모두 병원에 입원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천불동 계곡에 가면 사람들을 구조하고 마지막으로 넘어오다가 계곡에 돌이 구르면서 줄이 끊어져 죽은 대원 명패가 귀면암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한국산악회 구조대와 적십자 구조대가 모여 설악산 축제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신흥사에도 산악인의 문이 있습니다만 신흥사와 함께 대한민국 산악인들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신흥사가 옛날처럼 사하촌 사람들의 어려움과 기쁨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민족의 신앙과 고유관습이 불교문화와 잘 융화되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민족문화 유산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상미 본지 객원기자 | jygang@buddhapia.com
2007-08-22 오후 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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