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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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로 절집 마을 하나
21.용문산 용문사
속세의 번잡함일랑 벗어두고 무량청정토에 입성하라며 계곡물소리가 자꾸 따라온다. 일주문을 앞에 두고 나무판에 쓰인 문구가 선문답을 나누자고 한다. “흐르는 시간과 나 사이에 아쉬운 것은 시간이 아니라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신이라며 화두를 던진다. 7월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늘어지는 몸과 마음, 얼음냉수 한 그릇으로 갈증을 해소한듯하다. 귀밑을 스쳐가는 작은 솔바람에도 감사하고 짝을 부르는 새소리도 새겨들으며 걷는다. 경내에 들어서자 푸른 용문산 자락이 와락 품에 안긴다. 몸 안에 푸른피가 도는 느낌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진덕여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우왕 4년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로 부터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 조안 화상이 중창불사를 하였다.

순종 원년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 일본군이 절집을 불태워 터만 남아 있는 곳에 취운 스님과 태욱 스님이 불사를 시작하였다.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도 조성하였다.

용문사의 유래를 잘 알고 있는 양기석옹이 역사는 바로 써야 된다며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용문사 창건을 신덕왕 2년에 했다고 하는데 은행나무 안내문에는 의상대사가 나무를 심었다는 문구가 있어요. 신덕왕과 의상 대사는 살았던 연대가 약 300년 차이가 나거든요. 신덕왕은 신라 53대 임금이고 의상 대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때 살았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무를 심었다고 하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은행나무의 높이와 넓이도 자료마다 틀려서 바로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는 후손들에게 바로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용문사 사천왕문 자리에는 은행나무가 앉아있다. 천연기념물 30호인 은행나무는 신라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지만 은행나무는 다행히 화를 면했다. 사천왕전이 불탄 뒤부터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변고를 알렸단다. 그런 연유로 조선 세종 때 정삼품보다 높은 당상직첩을 하사받은 명목이 되었다. 사하촌 신점리 사람들도 신령스런 은행나무를 숭배하게 되었다. 매년 음력 3월 3일이면 절집에서도 조상님의 극락왕생과 자손의 무병장수를 위한 은행나무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신점리가 사하촌으로 형성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옛날에는 없는 사람들이 절 땅에서 많이들 살았지요. 총무원에서 재산관리를 위한 스님 한분을 발령 냈는데, 집 없는 사람들이 스님에게 집짓고 살게 땅이나 좀 주시오. 하면 땅을 주었지요. 일 년에 쌀 한 두 말 내고 살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절집과 사하촌이 협조하며 가족처럼 살았지요. 화전민도 많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산을 개간하기도 하고 절집 농사도 지어주며 살았지요.”

“사하촌이 국민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절 땅에 살던 주민들이 내 땅에 집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주지스님이 바뀔 때마다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지요. 군에서 절 땅을 사서 상가를 조성해 마을사람들에게 분양을 했습니다.”

지금 신점리는 160세대가 어울려 산다. 대부분 장사를 해서 돈을 만지는데 예전에 식당을 한 사람들은 뱀탕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내 카메라를 보더니 아주머니가 사진을 찍으러 왔느냐며 친절하게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용문산 계곡이 좋아 여름이면 야영객들이 많았지요. 군에서 놀이공원을 추진해 놀이기구가 들어오면서 야영객들이 줄었어요. 주민들은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공해를 피해서 쉬러 오는 손님들에게 맞지 않을 것 같아 반대했지요. 차라리 겨울철에 손님이 없을 때 눈썰매장이나 만들어 겨울장사를 하게 해달고 했습니다. 지금 놀이공원은 애물단지입니다.”

주민들은 개발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감춰두고 있었다. 도립공원이나 국립공원이라면 몰라도 국민관광지에 불과한데 생각 없이 개발하여 사하촌과 절집 문화공간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등산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산이 좋고 물이 좋기 때문이란다.

용문사에서는 고승들도 많이 나왔다. 무학 대사와 정지 국사도 용문사에서 정진을 하였다. 스님들이 불경공부에만 열중하느라 산문 밖 출입이 없어서 그런지 사하촌 사람들과 절집이 교류하는 문화는 거의 없다고 했다. 서로 이해가 엇갈려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절집에서 상가를 유치하려고 하자 아랫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있다. 절집에서는 이미 불교용품 판매점 허가를 내놓고 있어서 서로 마음 당기기를 하고 있다.

사하촌에는 불교신자와 기독교 신자들이 어울려 산다. 장로교회가 두 개나 있다.

“주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장이 재주가 됩니다. 마을 화합차원에서 제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지요. 그런데 지금 이장이 기독교인이라 다른 사람을 선정합니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의식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선근공덕을 쌓으며 살면 그뿐이지요.”

정미의병의 발상지답게 양평 사람들은 붓다가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내놓을 수 있는 도량을 지니고 사는 듯했다.

염주 만드는 김용권씨
사하촌에서 김용권씨를 만났다. 그는 용문사에서 매점을 하며 살다가 염주를 만들게 되었다. “장사를 하다보니까 남자는 별로 할 일이 없어, 술값을 스스로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게 되었지요. 나무 한차를 사다가 염주 만드는 사람한테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 일이 일주에 되는 일이 아니라 기계를 사들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염주를 만들면서 남들이 만들지 않는 염주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주인자 장치미 방법’으로 발명특허를 내게 되었지요. 작년 팔월에는 불자들이 염주를 목에 걸 수 있도록 고안한 백팔염주로 실용신안을 내기도 했습니다. 염주에 달마를 새겨 넣고 이젠 돈을 좀 벌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팔리지 않았습니다. 방송에서 달마가 수맥을 없앤다는 소문이 듣고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실패한 것은 칠성염주를 만들었을 때와 연꽃에 관세음보살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늘 내 머릿속에는 새로운 염주를 만들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죽을 때가 만들고 싶은 염주를 다 만들지 걱정입니다.”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부처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특별한 염주를 만들기 때문에 도매상들이 직접 와서 사간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면 반은 팔고 반은 잃어버렸단다. 사람들에게 불연을 맺어주고 싶은 발심으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에 도둑을 잡아본 적은 없단다. 비오는 거리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이 염주를 단 차를 세워 태워달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염주가 꼭 불자에게 국한 된 것만이 아니라며 의미 있는 말을 던졌다.
양평=김상미(수필가 본지객원기자) |
2007-07-26 오후 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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