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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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과 함께 살아 가진 것 없어도 부자
정족산 전등사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나무가 있다. 전등사에는 500년도 더 산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리는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 거기에 얽힌 설화를 들어보자. 철종 임금 때 전등사는 조정으로부터 은행 이십 가마를 바치라는 전갈을 받았다. 한 해 은행 수확이 열 가마인데, 두 배의 은행을 바치라는 것은 관청의 무리한 요구였다. 노스님은 관리들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화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다가 도력이 높은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부르기로 했다. 스님은 3일 기도에 들어갔고 기도가 끝나는 날 사람들 무리에 섞여 있던 관리들 눈이 갑자기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도를 끝낸 스님이“더 이상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는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먹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로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절집마다 설화들이 전해지지만, 살아서 사람살이를 지켜보는 것은 나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사람들이 남기고 간 글귀보다 더 담백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나무의 물관 속에 깊숙이 배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화도 전등사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1332년 고려 왕실은 몽골의 침략을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였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경내에 가궐을 지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서 지형적인 특성으로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 기둥과 벽화에서 이름이 적혀 있는 낙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강화도는 해안요새 역할을 감당하느라 시련이 많았던 탓인지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여러 가지 종교가 혼재해 있어 종교문화의 성지처럼 느껴졌다. 온수리라는 작은 마을에 전등사와 온수교회, 온수 성공회성당이 터를 잡고 있다. 절집 아랫마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불자가 아니라 기독교인 이었다. 동문 입구에 앉아 두릅을 파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교회 권사이지만 전등사를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제철 나물들을 팔아 용돈으로 쓴다고 했다. 초파일이 되면 절집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등불 밝히는 일을 잊지 않는단다. 절집은 누구나 드나들며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보리수를 한 모금 얻어먹으려고 공양간에 들렀다가 온수리에 사는 공양주 보살 장화자 씨를 만났다. 비구니 스님들은 절집 부엌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보살은 그저 절집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단다. 자녀들은 다 출가시키고 소일거리를 찾던 중 우연히 공양주 보살 되었다. 석가탄신일 날 3군데 사찰을 돌며 등불 밝히는 것이 연례행사였는데 요즈음은 바빠서 보시에 게으르다며 새벽 종소리처럼 맑은 웃음소리를 낸다. 어려서부터 절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늘 즐거움 이었다는 그녀는 건강이 따라줄 때까지 공양간을 지키고 싶단다.

사람 마음의 도량은 얼마나 깊어 질 수 있는 것일까. 온수리라는 지명이 사람들 마음을 선하게 다스리는 것인지, 온 동네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탓인지 모두 마음 도량이 깊다. 박덕례 이장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내 전화를 받고 친절하게 절집까지 찾아 와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을 부자로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라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어서 바로 근심이 되어버린다는 말이 법문이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지 못할지라도 올바른 사람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단다.

“나의 삶의 철학은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지요. 어렸을 때 정족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부모님께 쌀을 사다드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때 가장 부러운 것은 상급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배우고 나서 버리는 책을 갖다가 혼자서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지요. 육이오 전쟁직후에는 전등사에 미군들이 관광하러 많이 들렀어요. 소를 먹이다 말고 미군들이 들어오면 쫒아가서 말을 붙이며 노트에 적어서 영어를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영어 배우기를 좋아하던 나는 전등사에 놀러온 ‘보비’라는 군인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집에 초대해 식사도 대접하고 편지 왕래도 했었지요. 우리나라에는 흑백사진 밖에 없던 시절 보비가 우리가족 사진을 찍어다 일본에서 칼라로 현상해서 갖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 사진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지요.”

가난을 온몸으로 물리치려고 했던 이장님의 몸부림이 한편의 드라마 같다. 온수2리는 약 300세대가 어울려서 살고 있는 작지 않은 마을이다. 그는 30대에 동네 이장을 보다가 성실성을 인정받아 면사무소의 기술직공무원이 되었다. 지금은 퇴직하고 산불방지요원으로 전등사 뒷산을 지키고 있다. 3년 전부터 온수리는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단다. 아파트가 한 채 지어지고 약 80세대가 외지에서 이사를 들어왔다. 그는 환경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강화도의 화문석이라고 했다.

시골아낙네들의 부업으로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었던 소중한 전통공예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옛날에는 강화 화문석 축제도 있었는데 지금은 행사가 중단 되었다. 모든 것이 기계화 되어도 손으로 짤 수밖에 없는 것이 화문석이란다. “지금은 개성이 가까워서 그런지 인삼 농가가 많아졌어요. 약쑥, 순무, 강화섬 쌀이 유명하지요. 해풍을 맞고 자란 쌀이라서 가격이 좀 비싸도 도시 사람들이 선호하는 쌀입니다.”

온수리 사람들은 강화도의 풍경답게 소박하게 산다. 농외소득을 높이기 위해 호박고구마라는 품종을 개발해 생산하고, 초지진에서 숭어, 새우. 밴댕이를 잡기도 한다. 공장이 없고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다른 것으로 소득 얻기가 어렵지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 고향집에 들른 기분이 드는 강화에는 여러 가지 규제가 많지만 바다 생태와 자연 생태를 보존하기 위해 인내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산다. 전등사와 온수리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하며 어울려 살고 있는 모습이 서방세계였다. 그들은 고인돌축제와 새우젓축제로 문화를 알리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화문석 아주머니 유길순
화문석은 고려시대부터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하여 경공업이 발전하지 않아 비닐 장판을 쉽게 구할 수 없던 시절, 짚보다는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완초(왕골)가 온돌방 문화의 주인이었다. 양도면 길정리에서 지금도 틈틈이 화문석을 짜는 유길순 아주머니를 만났다.

“시집을 와서 보니까 화문석을 짜는 고장에서 시집온 사람들이 자리를 짜고 있었어요. 재미있어 보여서 이웃 동네에 가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동네에 퍼져 화문석 짜는 사람들이 많아 졌지요. 엊그제 배운 것 같은데 벌써 30년이나 자리틀에 앉았네요. 화문석 짜는 것은 원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손이 많이 갑니다. 왕골을 하우스에다 심어서 좀 자라면 모내기 하듯 논에다 하나씩 심어요. 키가 자라 꺾이면 상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일이 줄을 매주어야 해요. 7월 달에 추수를 하는데, 맑은 날 새벽 논에 나가서 수확을 합니다. 아침에 들어와서 식사를 마치고 왕골을 다듬어서 연탄불에 찝니다. 커다란 광을 지어서 선반위에 널어놓고 아래에 연탄불을 피워서 24시간 말리는 과정입니다. 불이 시원치 않으면 색이 변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빨리 말려야 좋은 색을 낼 수 있지요.”

화문석에 쓰이는 완초는 길고 굵은 대를 3등분으로 나누어서 사용하는데, 속대는 걷어내고 겉대를 사용한다. 문양을 넣는 작업을 하기 위해 일일이 물을 들여서 잘라내, 도안을 보고 끼워 넣기를 한다. 손재주가 없는 사람은 화문석을 짜지 못하기 때문에 농한기 때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규격은 10자 9자 8자로 구분하는데, 지금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 수가 적어서 수입이 예전보다 낫다고 했다.

“옛날에는 내다 팔았는데 지금은 짜기만 하면 상회에서 전화가 옵니다. 똑 같은 물건도 솜씨가 좋으면 3~4만원 더 얹어 줍니다.”

화문석을 짜는 실은 고드렛 돌에 일일이 손으로 감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부부가 하기에 좋은 작업이란다. 농사지어서는 못 가르치는데 자녀 셋을 다 대학까지 보냈다며 화문석이 장학금이 되어 주었다고 말했다.

“농한기에 일주일이면 둘이서 화문석 하나를 짜지만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서 아이들 책가방이 없어지면 그만 두려했는데 소일거리가 없어 심심풀이로 조금씩 짭니다. 젊어서는 아이들에게 학비를 줄 요량으로 밤이고 낮이고 열심히 했지요. 장날 나가서 팔면 돈이 되기 때문에 재미도 있었고요. 안타까운 일은 화문석을 짜는 젊은 사람이 없어서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하여 걱정이 됩니다.”

전통문화를 묵묵히 다듬어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한국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상미 객원기자 |
2007-07-03 오후 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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