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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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절 혜택 많이 입고 삽니다
송광사 아래 외송리
송광사에 갈 때마다 사람주나무를 본다. 미끈한 종아리를 가진 사람주나무를 오래 전에 두고 온 나를 보듯이 자세히 본다. 지난겨울의 혹독함을 견딘 나무는 어느새 새 이파리를 달고 있다. 얼마나 속이 뜨거웠을까. 잎 색이 붉다. 사람주나무 옆에는 서어나무 굴참나무들이 저마다 잎을 내밀고 있다. 세상에 있는 색깔 중에서 봄 나무의 잎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굴참나무 서어나무는 투박한 남정네의 손처럼 굵은 각질의 피부를 가졌고, 사람주나무는 열여섯 처녀애의 종아리처럼 미끈한 피부를 가졌다.

절로 가는 길은 언제든 마음 접는 길. 거듭 절하며 나보다 더 하찮게 여겼던 것들에게 미안해하며 가는 길. 뉘우치며 가는 길. 느리게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보 사찰의 하나인 송광사. 몇 년 전 나는 송광사에서 부처님의 복장유물을 친견하는 영광을 맛보았다. 광주 자운사 아미타좌상의 복장유물을 조사하는 전문가 분들과 함께한 자리였는데, 묘법연화경, 주금강경 등과 함께 발견된 자료 중엔 ‘헌겁 한 쪼가리’까지 시주한 내역이 적힌 문서도 있었다.

송광사는 언제 와 보아도 단정한 모습이다. 매무새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학승의 모습이랄까. 우화각을 지난다. 우화각 아래 홍교에는 백년도 넘었을 엽전 몇 닢이 매달려 있다. 옛날 절을 지을 때 남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후세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둔 것이라 한다. ‘엉겊 한쪽까지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그 마음 그대로다.

절 내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보물이고 국보다. 사천왕상을 지나자 종무소가 나온다. 종무소에 계신 분들과 몇 마디 나누었더니, 홍삼으로 만든 과자를 준다. 대웅전 마당은 정갈하다. 비사리구시에 눈 한 번 주고 마음은 풍경에 매달린다. 맑은 풍경 소리 끝에 조계산의 꽃들이 피어난다. 닦아도 더께 가득한 가슴 속에 문득 울리는 풍경 소리가 물길을 낸다.

징검다리를 지나 절을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있다. 바위를 악착같이 감싸고 있는 나무의 뿌리들. 뿌리들의 안감힘을 위무라도 하는 듯 물소리는 낮고 차분하다.

일주문 근처에는 조계산에서 나왔을 나물이나 약재를 파는 할머니들이 있다. 장사가 잘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늘어선 식당 앞에는 물건을 덮어 둔 포장이 밧줄에 동여매져 있다.

“마수도 못했소. 당아.”
이애자 할머니(80)는 둥글레, 헛개 열매, 고사리, 표고, 호박 말린 것 등을 팔고 있다.
“차로 쩌 우게다가 다 대뿔고, 하레 마수도 못할 때가 쎄부렀어. 저 보씨요. 저 우게 가먼 노인들이 줄줄이 앙겄어. 나는 담배가 있어서 담배나 하나 폴라고 앙겄제. 담배 두 보루 폴아사 한 갑 남은다디야?”
마수도 못했다는 말에 헛개 열매와 둘글레 등을 조금씩 산다.
“댈에(달여) 잡수먼 좋아요. 간에도 좋닥항께, 드씨요. 만원인디, 마수고 긍께 오천 원만 주씨요. 갖고 가서 약해 잡수시요.”
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고, 며느리와 손자와 할머니, 이렇게 세 식구가 산다. 손자 학용품 값이라도 벌려고 하는 일이지만, 그도 시원치 않다.
“일정 때게 태어나서 눈도 봉사제.”
물건을 좀 더 샀더니, 몇 움큼을 기어이 덤으로 준다.

송광사 사하촌인 외송리(순천시 송광면)는 식당과 민박집뿐이다. 식당을 하고 있는 장대철(53)씨는 구산 스님과 얽힌 일화를 들려준다.
“계실 때게 뭐, 절약하셨죠. 구시에 밥태기도 있으먼 주워 묵고, 아깝다고 그만큼 검소하고, 든든하신 분이죠.”
구산 스님을 뵈면 항상 웃는 얼굴에 덕이 느껴졌다고 한다. 장씨는 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낸다. 비구승들이 몰려오기 전 송광사 스님들도 속가에서 지낸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장씨의 친구 중에는 스님네 자식이 꽤 있었다고 한다.
“세배를 꼭 갔죠. 스님네들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나아요. 세배 가면 돈 줘요.”
외송리 일대의 땅은 대부분 송광사 소유이다. 마을은 30여호 쯤 되었는데, 옛날 논 자리에 식당들이 새로 들어섰고, 원래 마을의 형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절 땅이 약 팔십 퍼센트 됩니다. 우리가 절 혜택 많이 입고 삽니다. 옛날에는 다 농사지었어요.”
농사철이 시작되어선지 마을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 집마다 민박집 간판을 내걸고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김숙자(61. 외송리)씨가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
“옛날 같이 손님이 안 많애요. 이, 뭐냐? 숭년(흉년)이 안 들었을 때, 그때 많앴죠.”
숭년이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더니, “아인에프”라고 말한다. 하긴 아이엠에프만한 흉년이 어디 있을까.
“닭도 촌닭 켜서 폴고, 이만 원씩에 막 폴고, 백숙까지 삶아주먼 삼만 원은 받어사 돼. 근디 그 지서리도 못하겄습니다. 갑자기 할라먼 청소 해야제, 멋 하제.”
‘아들 서이 딸 둘을 다 여웠’다는 김씨에게 집 자랑를 해 보라 하였더니, 갑자기 차려 자세를 취하며, 말을 한다.
“여름내 오만 과일나무 있고, 두릅이랑 감나무도 있고, 우리집 오먼 안 좋아하는 사람 없어. 다 집터 좋다고 안 조와뵈는(부러워하는) 사람 없어.”
산 바로 아래 집이라서 전망이 좋다. 그런데 닭장에 가 보니 닭이 한 마리도 없다. 왜 닭이 없냐고 물었더니,
“풀 뜯어 묵으로 갔제. 그랑께, 촌닭.”
하면서 환히 웃었다. 여러 종류의 산새들이 풍경소리보다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김씨에게 새들은 그다지 이로운 존재가 아니다.
“산수유도 내 껏이 아니여. 산수유 못 따요. 여름이먼 거 흑한 새가 다님서 복성(복숭아)이고 머이고 다 따묵어요. 젼딜 것이 없어요. 다 따 묵어부러.”
결국 산수유나 감나무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야생 조류인 셈이다. 그래도 김씨는 ‘새소리가 얼마나 좋냐?’며 활짝 웃었다.

조계산 야생화를 혈육처럼 여기며
김해화 시인


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자 시인 김해화. 그를 만나면 늘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보아도 정겹고 따스하고, 짠하고 어여쁜 사람. 공사판에서도 거칠기로 소문난 철근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감수성은 한없이 예민하다. 시를 쓰는 틈틈이 사진을 찍는 그. 그의 야생화 사랑은 지독하다. 비가 오는 날이나 공친날이면 어김없이 그가 찾아가는 곳. 조계산과 모후산 일대이다. 이 땅에서 산 깊고 물 좋은 데치고 피 묻은 싸움터 아니었던 곳 있던가.
“꽃들이 말을 해. 환청이 들려. 꽃들의 울음을 들으면 나도 몰래 눈물이 나지.”

그에게 야생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얼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다.

“우리 마을에서 처녀 하나가 죽었는데, 세상에 거기다 나무를 박아서 죽였다는 거야.”

그 처녀의 울음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어느새 시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그에게는 열여섯에 고향 떠난 분이, 여순사건 때 총 맞아 죽은 아재, 늙은 철근쟁이 이씨 등,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민중들의 모습이 얼레지꽃, 광대나물꽃, 히어리꽃으로 살아 말을 건다.

“세상에 수백그루나 되는 히어리 군락지를 잡목제거 한다고 베어 버렸드라고.”

최근 순천시에서 숲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잡목을 제거하였는데, 잡목으로 잘린 나무 대부분이 우리나라에만 자생하고 있는 히어리였다. 이 일에 제일 먼저 분노한 이가 김해화 시인이다. 강렬한 어조로 행정 당국을 비판하며, 시인은 혈육을 잃은 듯이 눈에 눈물을 단다.

시인의 야생화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몇 년 전에는 야생화 사진과 글을 모아 “김해화의 꽃편지”라는 책을 묶기도 하였다.

“한번은 모후산에 갔는데, 타래난초가 있는 거야. 눈에 잘 띄는 곳에 기가 막히게 피어 있드라고. 그래서 사진 찍고는 꺾어 버렸지.”
그의 입에서 꽃을 꺾었다는 말이 나오자 당혹스러웠다.
“사람들이 그거 있는 거 알면 캐 가 버리거든. 그런데 꽃은 꺾어 버려도 뿌리가 있어서 다 살아.”
방법은 같아도 사랑의 깊이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대흠 객원기자 |
2007-06-27 오후 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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