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대의 욕심으로 채우지 말고 곱게 나이 먹도록 놔두어야 할 곳이 절집이다. 문명의 헛바람을 따돌리고 자연 미학을 간직한 채 늙어가는 절집은 피붙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화려하게 분장을 한 가람들을 볼 수가 있다. 세월을 거스르려는 욕심을 덧바르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울 때가 있다.
사람들은 삶이 복잡해질수록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절접에서, 묵은 근심을 풀어버리고자 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용주사를 찾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택지개발붐이 일고 있는 지역이라 잘 못 길을 들어서 헤매느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싶었다. 수원 팔달문 앞에서 용주사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고 한 시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정수리로 내리 꽂히는 햇살에, 나른한 몸을 이정표 안내판 아래에 내려놓고, 초고속 인터넷에 익숙한 시간을 느림의 미학 읽기로 바꿔본다.
골 깊은 산골 마을도 버스시간 만큼은 상식이 통하던데 어디에서 오류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쉽게 탈 수 없는 버스라는 대답이 전부이다. 오기로 30분을 더 기다렸을까, 내 집요함을 져버릴 수 없었던지 버스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불편함에 한 마디 던질만한데 불평하는 승객이 한 명도 없다. 인공과 자연을 아우르는 절집처럼, 주변 여건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 모습이 또 다른 풍경이 되었다.
융건릉을 지나 용주사 입구로 들어서자 절집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오순도순 모여 살던 마을이 사라지고 불도저의 숨 가쁜 엔진소리만 가득하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파와 세간들이 파란 하늘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다. 절집과 함께 살던 사하촌 사람들의 흔적은 지워진지 오래고, 풍경소리로 귀를 적시는 절집의 고요함마저 누군가 빼앗아가는 느낌이다. 사천왕문 앞에서 막 깨어난 나무들의 파란 웃음을 만날 수 있어서 그나마 삼문으로 들어서는 마음이 가벼웠다.
| |||
용주사는 조계종 2교구 본사로 당파싸움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정조대왕이 능사로 창건했다. 고려 말기 불교가 탄압 받을 시기에 140여 채나 되는 사찰규모로 볼 때 용주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정조의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효심은 부모은중경을 통해 세기를 뛰어 넘어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정조가 현.륭원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고 보경스님을 도총섭으로 하여 사찰을 중수한 후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그 날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 앞에 정조가 심었다는 회양목은 오랜 세월 사철 푸른 잎을 피워 올리느라 몸이 쇠약해졌나보다. 정조의 효심으로 지금까지 용주사 뜰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정조의 행차가 잦아짐에 따라 용주사 스님들의 세도가 당당했던 모양이다. 원찰의 위세라고나 할까, 스님들 사치가 심하다는 내용이 정조 실록에도 씌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사하촌과 절집은 함께 낡은 시간을 간직하며 역사를 써가게 마련인데, 용주사는 지금 까치고개와 송산리. 안녕리 마을 주민들과 개발로 인한 갈등에 휩싸여 서로 고립되어 가고 있다.
| |||
사하촌이 태안3지구 택지지구로 선정 되어 보상에 들어간 2004년 용주사에서 민원을 제기하여 야기가 발발했다. 만년제 라는 도 문화제가 있는데, 정조시대의 저수지이다. 문화재 300M 안에서는 건축행위를 할 수 없는데 주택개발공사가 그런 상황을 모르고 고층아파트를 짓겠다고 사업을 올렸고 경기도가 2003년도 승인을 해줬다. 용주사가 그 사실을 알고 주택공사에 개발 이의를 제기하자 주택공사는 용주사 옆 이만 사천 평을 공원화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용주사는 문화재 보호지구로 지정을 해 삼십육만 평을 전부 “효 공원”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자본을 들여 만들어 놓으면 자손들에게 좋은 문화유산을 물려 줄 수 있겠지만, 기하학적인 세원으로 공원을 만들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민들의 주장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사하촌 사람 주찬범씨를 만났다. "이야기의 발단은 문화재가 오 지정 된 데에 있습니다. 문화재 관련 공무원들에게 여러 가지로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 지정된 것에 대하여 학자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정확한 위치를 고증을 통해서 지정하지 못 한 것은 개발바람에 훼손 될까봐 급히 정리한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주민들은 군에서 지정한 위치가 만년제 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사찰이 문화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문화재가 잘 보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
만년제는 인공적으로 파놓은 호수이고 그 옆에 인공 섬이 하나 있었다. 융.건릉은 대한민국의 명당자리로 소문난 곳이다.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이라는 뜻을 지닌 땅인데, 만년제가 여의주라고 사찰에서는 주장하고, 주민대표는 택지개발지구가 아닌 능 옆 야트막한 까치 동산을 풍수지리학적으로 안산이라 하여 여의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잘못 지정된 문화재 앞에서 정조실록에 나와 있는 자료가 갈등의 고리를 풀어줄 것인지 의문이다.
안녕리, 송산리 마을은 일찍부터 국책사업으로 개발된 곳인데다, 국도 1번이 병점에서 들어와 상당히 발달된 도시였다고 한다. 차범근씨의 고향이기도 한 사하촌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도 동수원보다 큰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1963년에 약 삼십만 평 이씨 왕조 땅이 보훈처로 넘겨져 육이오참전 제대군인들에게 불하를 해주었단다. 이십여 가구가 들어와서 현대식 농장을 조성해 70년 최초로 낙농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아쉬울 것이 없는 마을이라 그랬는지 용주사와 사하촌은 서로 도우며 살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정호 스님이 제안하는 “효 공원”을 만들자는 의미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주민들이 입을 모은다. 역사학자 토인비도 한국의 “효” 사상을 미래의 문화혁명을 일으킬 정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역주민과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는 데는 지나친 이기주의가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하다. 주변 아파트 사람들은 태안3지구에 신도시가 들어온다는 믿음으로 들어왔는데, “효 공원”만 들어온다면 개발이 제한되고 모든 것이 묶인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병원이나, 학교 등 인프라를 구축해 놓고 아파트만 못 들어오게 한다든지,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좀 더 수용하고 더 세밀한 대안을 내어 놓았다면 큰 역사를 이룰 뻔 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 |||
택지의 헐값 보상을 받은 것도 지역주민들의 반발의 근원이 되었다. 경기도의 10군데 보상을 받은 택지지구 중 태안3지구가 가장 적은 금액을 받았단다. 공교롭게도 정부가 8.31부동산 대책을 발표하여, 투기지역 실거래가격 양도소득세 징수 발효시기와 맞물려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타협해 볼 생각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땅을 팔아버린 것에 아쉬움이 있는 듯했다. 주찬범씨는 직업군인 아버지가 젊음을 바쳐 정부의 개간촉진법 시범단지로 만들었던 땅이라며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아보더니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틀림없이 문화재는 어떤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보호 되어야하는 최고의 선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보호정책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집과 사하촌의 문화 갈등에는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은중경
정조대왕도 역대왕들과 마찬가지로 억불정책을 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부터 궁실에서 빈번하게 지어왔던 원당사찰 건립을 중지시켰던 정조가 어떻게 전 국민이 동참하는 불사에 용주사 건립 뜻을 세웠을까. 다름 아닌 보경 스님께 들은 불경 부모은중경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은중경은 크고 깊은 부모의 10가지 은혜에 보답하고자 가르치는 경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컸던 정조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첫째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넷째는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 여섯째는 젖을 먹여 기르시는 은혜, 일곱째는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 여덟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째는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은혜, 열째는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 용주사의 유물에서 쉽게 읽을 수가 있다. 용주사 건물들에 걸린 많은 주련들은 정조가 당대의 명 문장가인 이덕무에게 쓰도록 했다고 한다. 우리 자랑거리인 효사상과 경로사상이 문화유산으로 길이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