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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주 남산은 산 자체가 커다란 불국정토다. 일설에 의하면 팔만 구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현재 남아있는 어떤 절 보다도 규모가 큰 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의 안산인 남산. 이러다할 절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골짝 골짝에 남아있는 수많은 불상들이 옛날의 흥성을 짐작하게 해 준다. 현재도 남산을 빙 둘러 여러 채의 절이 들어서 있지만, 대개 최근에 생긴 절들이다.
갯마을에 이른다. 마을에 사람이 거의 없다. 겨우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 길을 묻는다. “바깥에들한테 물어 봐야지요.” 이 지역에서는 결혼한 남자들을 일컬어 ‘바깥에’라고 한다. 석불좌상이 있는 보리사에 가 보아도 인적은 없다. 갯마을이라는 지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작은 시내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남산 마을로 향한다. 헌강왕릉, 정강왕릉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인다. 경주는 가는 곳마다 왕릉이 있고, 유적지가 있다. 남산에 있는 왕릉만도 다섯 기가 넘는다. 태종무열왕릉비를 중심으로 조성된 통일전은 규모가 크다. 통일전 옆에는 서출지가 있고, 서출지가 있는 마을이 바로 남산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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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신라 때 꼴짝꼴짝이 전부 다 절이라요. 팔만 구 암자라고 한다는등만요. 현재 남아있는 절이 칠불암입니다. 지금은 암자지만 불상이 아주 좋습니다.”
임홍순옹(85. 남산마을)의 말이다.
“칠불암에서 이래 보면 신선암이 보입니다.”
칠불암에서 보면 신선암도 보이고, 옥룡암도 보인다. 옥룡암의 옛 이름이 ‘불박사’라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남산을 오르내렸지만, 남산의 가치가 얼마만큼 큰지를 몰랐다. 나무하러 다니며 불상들과 빈번히 마주쳤지만, 남산에 불상이 많은 것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을은 남산 마을 한 마을입니다. 지역에 따라 새남산, 안말, 탑말, 남쪽, 갯마을, 이렇게 하지요. 갯마을이란 데는 신라 때 개뻘이 있었어요..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어요.”
임광혁옹(80. 경주 남산마을)은 마치 신라 때 배가 들어온 것을 본 것처럼 말했다. 임광혁옹은 남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갖가지 설화는 물론이요, 직접 발굴지를 따라 다니며 본 것들까지, 세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서출지라는 데 아요?” 임옹이 난데없이 물었다.
“신라 21대 소지왕 때 반월성이 궁터임다. 안압지는 동궁텁니다. 거 이제 인정전이라 하더라고 거 소지왕 때 그때는 아주 태평성대라. 그런데 까막까치가 와서 우는기라.”
소지왕이 인정전 앞을 지나고 있는데, 까막까치가 와서 울었다는 것이다.
“까막까치가 와서 우는 거여. 그래 이상해서 까막까치를 따라 가는데, 가니까 돼지가 싸움을 하고 있거든. 근데 싸움 구경하는데 까막까치는 간 데 없어. 그때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 봉투 하나 주는 거여. 개봉시 일인사요 미개봉 일인사라, 궁에 들어가 사정갑하라. 철괴를 쏴라 이 말이여. 그래 거실에서 철괴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거기 중하고 왕비하고 간음을 하고 있는 거여. 지금 간판 있는 거는 고쳤고, 이게 전설 그대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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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혁옹은 전설의 내용이 잘못 기록된 게 많다고 지적하였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바꾸어 적었다는 것이다.
현재 마을 안에는 여덟 개의 절이 있다. 옥련암, 보리사, 칠불암은 오래 되었고, 근래에 여러 채의 절이 생겼다. 절이 수시로 생겨나고, 규모도 천차만별이기에 마을 사람 내에서도 어디까지를 절로 쳐야 할지 이견이 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임광혁옹이 비밀을 털어 놓듯이, “탑 다섯 기를 새로 세웠어. 그건 모를끼라.” 하였다. 남산(금오산)에 있는 탑 다섯 기를 예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새로 쌓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불교도라는 남산마을.
“이 마을은 이상해요. 기독교가 안 돼요. 딱 한 집인가 있어요. 이사온 사람인데 안씨네라고, 딱 한 집 있어요.”
유일하게 기독교인이 있는데, 그도 이사 들어온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일본놈 시대에 초가집 교회가 있었어요. 근디 딴 디서 일로 오지 남산 사람은 안 다닌기라. 동네서는 안 돼. 그래서 교회 뜯어서 동방으로 갔심더. 그래, 이리 큰 동네에 교회가 없나,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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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옹의 말허리를 자르고 다른 사람이 끼어 들었다.
“절은 쪼깐 절이거나, 땡땡이절이거나, 사이비절이거나 묵고 살만 하니끼리, 자꾸 생기고, 교회는 안 되니끼리, 나가고 글치.”
남산에서는 어느 절이건 이름만 붙여 놓으면 사세가 확장되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이 새로 생긴 절을 찾는 것도 아니다. 대개의 절은 외지에서 오는 신자들에 의해 유지된다. 마을의 가구 수가 200호가 넘지만, 모든 집들이 남산 자락에 도란도란 붙어있다. 골목길을 나서면 돌탑이 있고, 석탑이 서 있다. 가만 보니, 마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절집으로 보인다. 성과 속의 구분이 없다.
경주남산의 시인
남산에 미친 시인이 있다. 그가 남산에 오른 횟수는 300번 이상이 되고, 야간 산행만도 100회가 넘는다. 오죽이나 산이 좋았으면, 등산 전문가도 아니면서 ‘늑대산악회’라는 산악회를 결성하여, 한 밤중에 늑대 떼처럼 남산을 오르내렸을까. 남산에 가기만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정일근 시인(49).
경주 남산에 대한 정 시인의 사랑은 몇 년 전 한권의 빼어난 서정 시집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고, 이후로도 시인의 경주남산 연작시는 계속되고 있다. ‘경주남산’을 부재로 단 시만도 40여 편이고, 남산이 소재로 쓰인 시를 모두 합치면 몇 십 편이 더해진다.
“40을 앞두고 내가 이래 떨어질지 알았던 모양이지.”
남산을 들고나며 마흔을 앞둔 해에 그는 생사가 오고가는 뇌수술을 두 차례나 받게 된다.
이후 그는 경주 남산에 더 빠지게 되고, 그의 작품은 ‘서정시의 정수’라는 평가가 곁들여지며, 그는 ‘소월시 문학상’을 비롯하여, 유수의 문학상이 을 연이어 수상하게 된다.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일 년 삼백 예순 닷새를 /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아프고 난 후, 마음은 더 평온해져 얼굴이 마치 남산에 있는 부처상처럼 푸근해진 정일근 시인.
“남산이 이상스럽게 좋은기라. 무작정 좋아.”
남산을 보면 그의 시가 떠오르니, 경주 남산의 시인 정일근이 아니라, 시인 정일근의 경주남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