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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는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이 있는 조계종 17교구 본사이다. 경내에는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끄는 각황전(국보67호)과 20여 동 부속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약 30도로 꺾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른다. 금강문 서쪽 방향으로 빗겨 놓은 천왕문 배치가 독특하다.
오후 햇살을 등에 지고 아랫마을 황전리 마을회관에서 골 깊은 산자락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150호에 400여 명이 사는 동네는 산골 마을이라기보다 도시에 가까운 마을처럼 고샅길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가지런하게 쌓은 돌담 사이로 산수유 꽃이 빠끔히 낯선 나그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전리는 다른 마을과 다르게 개 짓는 소리가 없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나지막한 돌담처럼 오순도순 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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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농사를 지어주며 살았다는 한말남씨는 불교신자가 많아 교회가 들어서지 않는 마을이라고 소개를 했다. 화엄사 이웃으로 사는 마을 사람들은 초파일이면 일손을 놓고 절집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대접하는 불심을 지닌 듯 했다. 마을에 신도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사를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절집을 돕는단다.
“옛날에는 화엄사가 가난했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스님들이 춘궁기에 쑥 죽도 끓여먹고 그랬습니다. 해마다 절 농사를 지어 수(길미)를 받아 절집에 들여 놓곤 했는데, 좀더 많은 소출을 내려고 노력하며 산 것이 15년이구먼요. 지금은 농사법이 개발되어 흉년도 없고 소출이 평준화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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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으로 살아가는 황전마을에도 아픔은 있었다. 농지개량법이 발표되면서 정부에서 황전마을 소작인들에게 화엄사 땅을 불하해 주었다. 소작인들이 몇 년간 상환을 하고 등기를 했지만, 절집이 어렵다는 바람에 개인에게 나눠준 땅을 도로 절집에 돌려줬단다. 국보 사찰인 화엄사를 살리기 위한 마음으로 포기 했다는 이야기를 김용섭 이장님이 들려주었다. 전, 답을 잃었지만 억울함은 없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라며 부처님법 청량수를 먹고 사는 사람다운 말을 했다.
화엄사에는 스님들의 염불소리를 들으며 사철 푸르게 자라는 차나무들이 있다. 절집 뒷산에 조성된 자연 차나무 밭은 아랫마을 사람들 품을 사서 채취를 한다. 산에서 채취를 하기 때문에 뱀에 물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후덕하게 생긴 여우순씨는 요즘은 자연을 벗 삼아 살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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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당국으로부터 포획기간 발표가 있지만 엽총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인지라 개체 수는 자꾸 늘어 가고 있단다. 버섯을 따러 갈 때도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저녁 해는 급하게 산등성이를 내려와 꾸불텅한 능선을 그려 놓는다. 마음을 열어 놓은 사람들이 저녁노을 같은 이야기를 쏟아 놓으며 나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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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은 구례군 8개 읍면 중 가장 소득이 높은 부자마을입니다. 절집 아랫마을이라서 육이오 이전에는 화전민이 사는 빈촌이었습니다.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이 자연에서 소득을 얻기 시작했지요. 가을철에 싸리버섯, 꽃버섯, 능이버섯, 마지개버섯, 송이버섯 등을 채취해서 관광객들에게 팔고, 봄철에는 고로쇠, 거자수나무 수액을 채취해서 도시에 팝니다. 황금 밭이라는 뜻을 지닌 황전리 마을 이름 덕을 톡톡히 보는 것 아닌가 싶어요.”
이장님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있다며 놀이터로 안내했다.“이것이 당그레 바위(곡식을 긁어모으는 농기구)입니다. 새마을 운동 당시 길을 넓히면서 땅속에 묻어 버렸던 것을 발굴해 다시 복원 했습니다. 그리고 당그레 거리”라는 길 이름을 지어서 부르고 있지요. 아마도 부자 마을이 된 것은 당그레 바위가 마을의 안녕을 빌어 주었기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황전리 사람들은 마음 나누기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화엄사 뒷산에서 채취하는 고로쇠 수액은 적당량을 화엄사에 내놓고 ,국립공원관리소에도 나눠 준단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이장님이 마을 발전 청사진을 꺼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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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는 지리산의 제일 큰 관문입니다. 그런데 천왕봉. 노고단, 성삼 재에 겨우 삼백 대 주차시설이 되어 있지요. 대부분 관광객들이 차를 이용하여 산에 오르기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동물들의 안식처를 빼앗는 격입니다. 케이블카를 놓자는 주민들과 환경단체가 줄다리기를 하는 중입니다.” 황전리 사람들은 마음 문을 닫아걸지 않고 소통하며 잘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듯했다.
마을뿐만 아니라 화엄사(주지 종삼)도 폭넓은 소통을 꿈꾸고 있다.4월 2일부터 핀란드 헬싱키 국립문화박물관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전통불교''라는 주제를 내걸고 전시회를 연다. 유럽의 대표적 기독교 국가 핀란드에 불교가 소개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포교의 불모지인 유럽지역 전법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리산의 정기가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돕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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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을 입구 정자나무처럼 동네 사람들에게 안식을 선물하는 사람이다. 젊은 날 화엄사 종무소에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정토의 세계와는 인연이 깊다. 한 때 지리산의 도벌꾼 지킴이로 산감 임무를 맡아 보면서, 법에 어긋나면 마을 사람들도 공과 사를 분명하게 가려서 처벌했단다. 청렴함을 인정받은 그는 18년 동안 이장을 맡았고, 가난해서 하대 받던 마을을 부자 마을로 만들었다. 마을이 우수 민박 촌으로 지정받아 농외소득이 높아지자, 가난의 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행정에 어두워 찾지 못하는 권리를 동네 사람들에게 찾아주고 ,씨족 사회의 잔재가 남아있어 김 씨와 박 씨가 아니면 이장을 못 하던 불문율을 깨트렸다. 처음으로 해조 오 씨인 그가 이장을 맡게 되자 인구가 많은 씨족의 이기주의가 흔들어 댔지만, 봉사하는 마음으로 초심을 잃지 않았다. 개인에게 이득이 되는 것과는 타협 하지 않고, 마을에 득이 되는 것과 타협하며 공공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군청 문이 닳도록 드나들며 힘들었지만, 지내 놓고 보니까 뿌듯한 것이 있습니다. 마을이 자연녹지 지역이라 세금에 불이익 당하는 것이 많았는데 주택, 상가 지역으로 형질 변경을 해서 세금을 줄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이장직을 넘겨 줄 때 마을 사람들은 감사패와 공로패로 박수를 보내주었다고 했다.
그의 봉사 정신은 다시 구례군 노인 대학 총동문회 장직으로 옮겨졌고, 남원 안과와 자매결연하여 노인들에게 무료로 백내장과 녹내장 수술을 받도록 주선하고 있다. 칠순이란 나이는 그에게 숫자에 불과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