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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남쪽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찰이다. 절까지 걸어 들어가는 거리가 만만치 않고, 휘어진 길모퉁이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버티고 서 있어서 오랜 고찰임을 증명한다.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은 강선루다. 강선루 아래쪽의 홍교는 새로 보수를 하였지만, 옛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강선루는 두 줄기의 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졌는데, 돌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이다.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으려한 선조들의 자연관이 그대로 살아있다.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여느 절과 다르게 길다. 굽이굽이 돌아서 만난 건물이 강선루인데, 여기에서 두 굽이를 더 가야 일주문이 나타난다. 녹차로 유명한 곳답게 야생차밭이 도처에 널려있다.
일주문에서 범종루, 만세루, 대웅전에 이르는 건물의 배치가 이채롭다. 단정한 건물들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일주문에서 오른쪽으로 몇 발 내디딘 곳에 범종루가 놓여 있고, 그 뒤의 건물들도 각각 조금씩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흐트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삐틀삐틀 서 있으면서도 정교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선암사의 진면목은 건물 안의 벽화나 천정화까지 보아야 비로소 드러난다.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문창살 문양도 선암사만한 곳이 드물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암사를 선암사이게 한 것은 무우전 옆 620년 되었다는 홍매화다. 꽃샘추위 탓에 갓 피어난 홍매화의 꽃잎이 조금 오그라들었다. 사진작가 몇 사람이 홍매의 속살을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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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는 선맥과 함께 다맥이 유유히 이어져온 절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물론이요, 차를 좀 마신다는 다인이라면 선암사 녹차를 명품 반열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그 수확량도 만만치 않아서 선암사에서 찻잎 따는 날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한다. 차와 선암사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듯이 선암사 사하촌인 괴목 마을도 녹차와 인연이 깊다.
마을 뒷산이 거의 야생 녹차가 자라는 괴목 마을. 마을을 골짜기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승주읍 죽학리 2구. 마을 안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는데,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얘기를 들어보니 대부분 고로쇠물을 받기 위해 산으로 갔을 것이라 한다. 가게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북당골이라고 있지라. 비석 있는데, 부도가 있어요. 거 뒤로 북당골이고, 일주문 우측에 거가 동네가 있었어요. 거기가 새동네 땅. 찻집에서 송광사 가는 길로 냇물 가에 거가 옛날에 집터라. 밭이 있고, 쬐까만 다리 하나 있고, 거가 부도 하나 있어요. 공마당. 콩마당이라고 해요.”
이영선씨(64. 죽학리 괴목)의 입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마을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
“상밭뗑이, 산밭등이라고 해. 웃삼밭, 아랫삼밭.”
곁에 있던 장봉례옹(77. 괴목)이 거든다. 마을 노인정에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동네 어른들이 다 물 뜨러 가고, 팔십일 세 드신 분도 물 받으러 가.” 한다.
몇 시간이 지나 어둑발이 성큼 마을로 들어선 후에야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물 안 나드라. 참말로 몸써리나게 안 나오네. 추워서 안 나옹가, 더워서 안 나옹가. 참말로 안 나오네.”
지막기씨(64. 괴목)가 산에 갔다 왔다면서 한 마디 한다. 조계산 골짜기는 고로쇠나무가 많은데, 전부 선암사 소유인지라, 마을 사람들이 고로쇠물이 나올 때면 일정액의 세를 주고, 한 골짜기씩 맡아 고로쇠물을 채취한다고 한다. 고로쇠수액이 나오는 양은 날씨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한 해에 한 가구당 60통쯤 얻는다. 약 30가구쯤 되니, 고로쇠물로 벌어들이는 마을 수입이 1년에 1억원쯤 된다는 얘기다.
“옛날에는 우리 마을에가 승려 생활 하시는 분이 많았어요. 스님들 내려와 놀다가 해지면 올라가고 그랬죠.”
예전에는 스님들의 속가가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옛날 스님들의 후손이 지금도 사느냐고 하였더니, 지막기씨가 “얼마 없어요”하더니 손가락을 꼽아가며 수를 센다.
“꽂감, 동기생, 감금남 직 아부지,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하더니, “우와 많네. 여덟 명이나 되네.”
녹차 이야기가 나오자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동네 여자 전부 다 차 덖는 기술자이어라우. 이녁 묵을 것은 집에서 다 해요. 선암사에서 찻잎 딸 때도 우리 마을 아줌마들 딸올(따라올) 사람이 없다요.”
장연희씨(61. 괴목)의 말이다. 각 집마다 자기 소유의 차나무가 있고, 거기서 찻잎을 따다가 각자가 덖어서 음용한다고 한다.
“꺼만 솥단지에다 해 갖고 다 덖지요. 몇 나무만 있어 갖고, 우리 묵을 놈만 해요. 아홉 번 덖은닥 한디, 내가 보기에는 더 덖읍디다. 내가 볶아봉께.”
그 차맛이 궁금하다고 하였더니, 기어이 집으로 데리고 가서 차를 대접해 준다. 은은하고 깊은 맛이 수준급 수제차이다. 선암사 골짜기에 차향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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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원리로 차를 덖는다 - 명인 신광수씨
국가 지정 유일한 야생차 명인 신광수씨()를 만난 날은 노랗게 산수유 꽃등이 내걸려 있었다. 선암사 고매(古梅)도 꽃망울을 터트렸다. 차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는 선암사의 주지였던 부친에 대해 먼저 말했다. 그의 부친은 선암사 주지를 지낸 바 있는 용곡 스님으로 서산대사로부터 시작된 선암사 차맥을 이어온 분이다. 선친의 영향으로 차밭이 놀이터였다는 그. 그가 좋은 차의 조건으로 맨 처음 내세운 것은 재료였다.
전 세계적으로 차의 종류는 650종에 이른다. 그중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 20여 종 되는데, 80-90퍼센트는 야부기다를 비롯하여 1900년대 이후 개량된 것들이다. 그가 재료로 쓰는 것은 개량종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는 소엽종이다. 수확량이 개량종에 비해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수익률이 떨어진다.
평생 차를 마시며 서너 번 정도 소름이 끼칠 만큼 머리 속이 서늘해지며 맑아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는 그. 최고의 차 맛을 위해 그는 지금도 손수 차를 덖고, 날마다 작업일지를 쓴다. 82년 동경에서 열린 세계 다류품평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덖는 기술도 남다르다. “곡우 때는 22도쯤 기온에서 열흘 정도 자란 잎이라 낮은 온도에서 덖어야 하고, 입하 때는 30도쯤에서 자란 잎이라 가마솥 온도를 300도쯤 올려야 하지요.” 솥의 온도뿐만 아니라, 유념 방법도 달리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땔감이다. 그가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는 참나무, 감나무, 오동나무, 밤나무 네 가지이다. 다른 나무는 차향을 망치기 때문에 피한다. 보통 2년 전에 준비를 하여, 나무 특유의 진액이 빠진 후에 땔감으로 쓴다.
작년에는 일본의 차 전문 회사인 상다회와 차 수출 계약을 했다. 세계 최고의 차만을 취급하는 상다회에서 신광수 명차를 알아본 것이다. 2009년까지 100억원 상당의 차를 일본에 수출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상생이죠.” 재료 선택이나 제다과정, 땔감 고르는 데까지 상생의 원리가 들어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