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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 하룻밤은 부처님 품속인 듯 편안했다. 시대에 맞는 포교를 하는 산중 사찰 미황사는 문턱이 낮다. 달마산을 내려온 바람이 풍경 소리 법문을 밤새도록 들려주었다. 누구나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는 미황사에서 짧은 수행은 마음을 닦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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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의조 화상 꿈에 나타난 금인이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웠다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라고 일러 주었다.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한참 일어나지 않다가 다시 일어나 골짜기에 이르러 누워버렸다. 처음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마지막 머문 자리에 미황사를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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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때 융성을 거듭하던 미황사는 풍물패를 이끌고 청산도로 가던 배가 조난당하는 바람에 주지스님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89년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미황사에 지운, 현공, 금강 스님이 머물러 마음을 다하여 중창 불사를 시작했다. 불과 15만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름다운 미황사로 가꾸는데 사하촌 사람들의 애정도 한몫을 했다. 절집의 일이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동부청년회가 발을 벗고 나서서 돕는다. 이제 미황사는 사하촌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 한문 학당, 탁본, 생태 체험, 별자리 탐험, 오카리나연주등 교육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산골 마을 사람들을 잠에서 깨운다. 마을로 내려온 스님은 더불어 살아가는 서정,산정,미아리,어불리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정월에는 마을 당재를 모셔주기도 한다.
마을 당재는 음력 14일 동네 아낙들이 다라(함지박)에 한상씩 음식을 차려와 동네 앞에 진서를 하고 군고패가 굿을 치며 당재를 모신다. 달마산 아랫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스님은 절 주인이 지역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여러 가지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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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산사 음악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찰이다. 전문 공연 단체에 행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주지스님이 지휘 본부장이 된다. 몇 안 되는 종무원들이 전국에서 모이는 많은 관객들을 수용하기 어려우리라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무대 설치부터 식사 대접까지 모두 사하촌 사람들의 봉사로 행사를 마치게 된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템플 스테이 손님이 많은 미황사에는 공양주 보살이 둘이다. 필요할 때마다 아랫마을 아낙들이 돕는 손길이 된다. 그것은 먼저 스님이 마음 문을 열어 두었기 때문 아닐까. 스님은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차담을 나누며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미황사에 들렀다가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스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쉬워 매달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였단다. 성북동 법천사에서 “참사람의 향기”를 통하여 참된 마음들이 소통을 하고 있다. 삼월 달에는 미황사 주변의 향기를 전해주기 위해 학가리에 사는 정기열 할아버지(73)가 남도의 판소리로 어울림 마당을 만들었다.
미황사 사하촌에서는 스님들도 많이 나왔다. 설두 스님, 법두 스님이 장춘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대흥사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미황사를 부흥시키려 했던 혼허 스님도 사하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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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중창 불사를 위해 혼허 스님이 궁구패를 조직을 해서 스님들과 같이 시주를 구하러 다녔다. 영화 서편제에서 나오는 청산도로 마지막 시주를 구하러 가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구렁이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다음날 바다로 떠나고 풍랑을 만나 모두 죽고 설장구를 치던 사람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먼저 죽은 사람들이 설장구가 없어 굿이 안 된다고 부르는 환청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그 일로 미황사 중창 불사가 한 번 꺾이고 백년 후 다시 뜻을 이루어 미황사가 되었다. 횡간도의 사자 바위에는 음력 2월 보름이면 굿소리가 나고 혼불들이 나타나 굿을 친다는 이야기를 어른신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그 때 미황사 궁구패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미황사의 중창 불사 꿈이 물속으로 가라앉았지만 백년이 지나 미황사 중창 불사가 시작되었고 ,궁구패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고 다음 생에 만난 스님과 상쇠가 사찰을 살리려 한다는 말들을 한다. 미황사가 추구하는 것이나 풍물 굿이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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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구패의 상쇠>
박필수 선생은 .중학교 때 도시로 나갔다가 고향집이 너무 그리워 다시 돌아와 악기를 만지게 되었다. 동네에서 굿을 치는 것을 많이 보고 자란 탓에 굿을 치는 것이 고향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왔을 때 어르신들이 당산 나무 아래에서 징과 꽹과리를 치며 노는 것을 보고 나의 여행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곳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그것은 보존하면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생생하게 나오는 그림이 없는가 하는 고민했던 것 같아요. 당산 나무 아래의 어르신들과 굿소리가 화면에 꽉 차게 들어오는 것이 나는 여기 머물러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지요. 나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비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도의 예술 정치라고 할까,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춤이 나오고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소리로 나오는 것이지요. 음악은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모두 함께 표현해 보고 자연 현상과 어울림을 갖는 것 입니다.
바람이 다르거나 물길이 다르거나 토양의 문제가 인간의 감성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악기를 두드리는 것은 신심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나와 내 속에 있는 신심과 한 판 놀이를 벌여야 되는 것이 풍물패라고 말했다.
스님과 박필수 선생은 미황사 산사 음악회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무모하게 처음 시도하게 되었다. 음악회라기보다 축제 판이라고 해야올을듯하다. 유명한 사람들 불러 오지 말고 지역의 문화를 가지고 가을에 1년 동안 수고하고 땀흘린 것들을 미황사에 와서 보따리 풀어내며 가득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산사 음악회에 쏟는 그의 열정은 남다르지만 대가가 필요 없는 순수한 봉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