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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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돌아가는 일 훤해
속리산 법주사

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절. 법주사는 호서 지방의 제일 승가람마로 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다. 1500년의 깊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는 법주사. 목탑 팔상전과 화려하고 웅장한 청동미륵대불이 미륵 신앙을 정신적 지주로 삼게 했다. 사하촌 오리 숲길은 역사와 문화의 흔적 속으로 안내를 했다.

내속리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정이품송을 만난다, 조선시대 세조의 행차 때 가지를 들어 올려 길을 내주고 벼슬을 얻었다는 정이품송은 지금도 건강하게 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내속리면에 100센티미터 폭설이 왔을 때 한 쪽 가지가 부러졌다. 팔을 잃은 나무를 보며 철저하지 못한 문화재 관리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힘들다 내색 한마디 하지 않은 나무인데 말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백산맥 줄기를 따라 거대한 산 무리에 발길을 들임으로 속세와는 멀어진다 해서 속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크고 높은 봉우리들이 서로 어깨를 내어주며 만들어내는 겨울 산 풍경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속리산은 맑은 공기와 물이 자랑이라지만 덤으로 인심을 가득 담아내는 산채 정식과 막걸리도 유명하다. 산사로 오르는 초입에 즐비한 간판들이 식욕을 당겼다. 암산인 속리산과 가장 어울리는 딸 부잣집으로 들어갔다. 연꽃처럼 훤하게 생긴 김봉래 사장님이 반갑게 맞았다. 한때 법주사에서 월탄 스님을 모시며 근무 했다는 그가 어린 날의 동화를 들려주었다.

“옛날에는 말티고개를 오를 때 버스가 힘이 없으면 사람이 뒤에서 밀고 올랐습니다. 원래 사하촌 자연 마을은 사내골, 청주나들이, 새터말, 민판골이었지요. 관광지 환경 개선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요식업 가구만 해도 70가구 인데 옛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못 먹고 살던 시절, 절 밑에 가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사하촌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백영한 사내1구 이장님 댁도 경남 거창에 살다 해인사에 일 다니던 할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해 둥지를 틀었다. 절집에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보수공사나 산판일로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법주사는 사하촌 사람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도지를 받아서 살림을 했다. 주로 콩과 쌀로 계산했는데, 추수철이면 법주사 종무소직원들이 스님과 함께 나와 답품을 했다. 답품은 벼 낱알 수를 세어 어림잡아 셈하는 것을 말한다. 답품을 하지 않을 때는 볏단으로 주기도 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사찰과 사하촌이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지는 않았나보다. -

“아버지 세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절집 아랫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스님을 양아버지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 연유인지 동네 소임을 보는 사람에게는 도지 없이 땅을 내 주었지요. 그런데 토지개혁이 일어나서 정부에서 산은 절이 갖게 했고 땅은 소작인들에게 분할해 주었어요. 돈이 없는 소작인들은 매년 추수해서 땅값을 갚았습니다. 당시 앞장 서 일하는 사람들이 절집과 가까운 사람들이었지요. 동네일을 보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절집과 잘 지내왔는데, 땅을 절집에 돌려주자고 주동을 해 포기 각서를 모두 썼지요. 땅을 모두 절집에 돌려주었지만, 소임 맡은 사람들에게 주었던 땅은 마을에서는 계속 관리를 해오던 중이었습니다. 그 땅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이 땅 주인을 찾는데 등기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동네 사람들은 동네 땅이라 주장하고, 절집에서 절 땅이라고 주장하며 법정 싸움이 벌어졌지요. 결국 동네 사람들이 고소를 취하 하고 말았습니다.”

사하촌 사람들은 절집 돌아가는 일에도 훤하다.
“법주사에 청동 미륵불을 불사할 때 월탄 스님과 각현 스님이 고생은 하셨지요. 금 80Kg을 화주해서 청동 미륵불에 금 옷을 입힌 것은 큰 업적이었지요.”

절집 인심은 가뭄에도 솟아나는 샘물인가 보다. 명절 때마다 사하촌에 쌀을 내놓기도 하고 속리축전행사 때면 산신제 제물을 모두 준비한다. 법주사 단오절 행사에서는 손님들과 사하촌 사람들을 초청해 승가대학 팀과, 한데 어울려 축구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승부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스님들은 승부근성을 어떻게 표현할까.

70년대 사하촌 악동(惡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설 명절이면 차례가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세배 하러 절집으로 향했어요. 방마다 돌아다니며 세배를 하면 스님들이 1원 짜리 지폐를 주셨는데 그 재미로 설을 기다렸지요. 그리고 절집에 사는 동자승들이 학교에서 인기가 ‘짱’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불전함을 털어가지고 오는지 학교 올 때면 항상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으니까요. 누룽지도 가지고 오고...” 친구들에게 군것질 보시를 하던 동자승을 떠올리는 백 이장님 얼굴이 하회탈처럼 변했다.

사하촌 사람들은 지역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절집과 협의 하며 여러 가지 방안을 세우기도 한다. 요즘 사내리의 현안은 문화재관람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문화재 관리를 위해 정부가 힘을 많이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놀이 공간이 바로 관광자원 이라던 말이 귀속에 박혀 나를 따라왔다.


신라의 걸작 쌍사자 석등 (국보 5호)
신라 시대 석등은 대개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구분하고 있다. 쌍사자 석등 하대석 연꽃은 번영을 담고 있다. 중대석에는 사자 두 마리가 있다. 입을 벌린 사자는 염불의 사자 부처님의 말씀을 뜻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참선의 사자 부처님의 진리를 뜻한다. 입을 벌린 사자와 다문 사자를 아험이라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우는 것처럼 입을 벌린 사자는 출생의 의미 이고, 입을 다문 사자는 죽음을 의미한다. 상대석에 연꽃이 피어있다. 그 위에는 오직 부처님 밖에 올 수가 없다. 부처님의 뜻을 밝히기 위해 예전에는 24시간 관솔불을 땠다. 그래서 석등 창 밖에 검은 그을음이 앉아 있다. 그 불빛은 부처님의 진리가 온 세상에 퍼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팔각 옥계 석에 세 개의 테를 두르고 다시 팔각을 떴다. 천장에 사각 틀은 우물 정자이다. 우물 정자는 각에 화재 예방의 뜻을 두고 있다. 핸드폰에 우물 정자가 들어가는 것도 화재 예방의 의미가 담겨있다.

자연으로 상 차리는 ‘딸부잣 집’
사내리 관광지구에 있는 딸 부잣집은 봄부터 가을까지 산에서 나는 나물과 약초를 채취해서 저장해 두었다가 겨울에 밥상 위에 올린다. 겨울 장사를 위해 옥화대에서 4월부터 10월까지 자연산 다슬기를 채취하고, 추석 일주일 전부터 능이버섯과 송이버섯을 채취해 냉동시켜 놓는다. 자연을 그대로 밥상에 올리는 소박한 마음이 바로 관광자원이다. 043)542-9876
김상미(수필가 본지 객원기자) |
2007-04-04 오후 12: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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