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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이 지독한 날이다. 3월인데, 길바닥에는 언 곳이 많다. 진눈깨비도 흩날린다. 평일이어서인지,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 새로 만들어진 주차장과 절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주차 단속을 한다는 살벌한 내용의 플래카드가 이물스럽다. 한적한 길 여기저기에 주차 단속중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단지가 된 식당과 숙소들을 지나 절로 향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절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니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인다. 대개의 큰 절 앞과 다르게 노점상 하나 없다. 한참을 올라갔더니, 절 조금 못 미치는 곳에 할머니 두 분이 나물과 밭작물 몇 가지를 놓고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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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는 절집 중 가장 완벽하다는 느낌이다. 신라인들의 이상적 피인이었던 불국. 현실을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려는 의지가 불국사를 낳았을 것이다. 불국사는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이며, 마지막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이다.
극락전 처마 아래에서 발견된 멧돼지상이 화제가 되어, 불국사에서는 ‘복돼지 출현 100일 기념 법회’를 열고 있다. 안양문을 지나 극락전으로 향한다. ‘안양’이란 극락정토를 이르는 다른 이름이니, 의미는 바로 통한다. 국보 27호인 아미타불을 배알한다. 이어 대웅전으로 향한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가려면 몇 계단 위로 올라가야 한다. 불국사를 만든 이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있는 배치이다. 대웅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불법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전이 있다.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은 내 안의 부처를 찾으라며 설법을 한다.
다보탑과 석가탑도 가히 압권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다 아는 것처럼 여겨지는 두 석탑은 통일신라가 이룬 우리문화의 자부심이다. 다보불은 과거의 부처이며, 동방 보정세계의 교주이다. 다보탑을 세울 경우에는 반드시 쌍탑을 세워 나머지 하나로 석가모니불을 상징한다. “다보불이 보탑 중 자리의 반을 석가모니께 내주며 그곳에 앉기를 청하니, 석가모니는 즉시 보탑으로 들어가 결가부좌를 하고 다보불과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라는 경전의 내용에 근거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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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을 떠올리며 그림자가 없었다는 무영탑(석가탑)을 뒤로 하고, 절을 나와 한참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부처의 세상은 더 높은 곳에 있고, 보다 낮은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오피스텔과 호텔과 식당이 즐비한 상가를 벗어나니 한적한 농촌마을이 보인다. 중리 마을회관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화투를 치고 있다. 저마다 노란 동전 한 주먹씩 가지고 재미나게 논다. 한참 기다렸더니, 김병달옹(72. 진현동 중리)이 물어볼 것이 뭐 있냐면서 판을 벗어난다.
“거 사는 사람들은 거 살고, 여 사는 사람들은 여 살고, 여는 중리 마을. 요 위에 가면 돌박이 있고, 요 아래 가면 아랫말 있고, 조 밑에 가면 문리 마을. 저 위에 새마을이라고 있고, 또 상가들 있고, 저 꼭대기 가면 진터라 있고, 고걸 합해서 진현동이라.”
마을 소개가 끝난 후, 마을과 절이 무슨 관련이 없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서서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참 지나서야 절에 관한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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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불국사 나무 때고 그럴 때, 마을 사람들이 나무 해다 주고 그랬어요. 요새 스님들은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나무도 해다 주고, 청소도 해 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나?”
말끝에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있다. 곁에 있던 김해봉옹(70)이 말을 꺼낸다.
“도로 파손되면 옛날에 부역이라고 있었어요. 일당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다 해 줬어요. 지금 있는 스님들 그런 시대를 모른다고. 옛날 주지 스님이 이 동네 사람이었어요. 최상문씨라고. 강원에 있었던 사람도 이름은 생각 안 나는데, 이동네 사람이었고, 오공필이라는 사람도 개곡 사람인데 이 동네 와서 살다가 석굴암 주지를 했어.”
스님들의 속가가 많이 있었다는 얘기다.
“결혼 했다카먼 다 쫓겨날 때, 그때 쫓겨난기라. 가족은 다 이 마을에 살았지.”
어렸을 때, 꼴 베러 토함산에 갔다가 초파일이면, 사과며 배 같은 과일을 얻어먹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공양한 음식이 배고픈 이들의 입으로 들어갔으니,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양이다. 절 앞에 있었다는 마을 이야기도 나왔다.
“불국사 우말이라 캤어요. 진현동 우말이라 캤는데, 지금은 완전히 이름도 없어졌어요.”
현재 생긴 상가도 두 번의 철거를 거쳐 형성된 것이라 한다. 썰렁한 상가 건물 주위에 코끼리 열차 운행을 반대하는 상가 주민들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므로, 경주시와 절 쪽에서는 운행 수단을 강구하는 모양인데, 상가 쪽과 마찰이 인 것이다.
취나물, 싸리대, 철쭉대, 잔대(참딱주) 등 이름도 풋풋한 나물들이 어우러진 산채 비빔밥은 성과 속의 사이에서 잘 비벼졌다. 철쭉대 나물을 먹는데, 문득 백석의 ‘여승’이란 시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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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닮을라믄 날마다 부처님 앞에서 절이나 해야지요
- ‘참 나’를 찾아가는 원명신 보살
매일 아침 석굴암으로 출근을 하여, 점심 공양이 끝난 후 절에서 나온다는 원명신(60. 경주 구정동) 보살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집에 있으면 뭐합니까. 목욕탕에나 다니겠죠.”
그녀는 경주 시내에서 도보로 석굴암까지 오간다. 오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힘들지 않느냐는 말에 웃음으로 답한다.
“부처님 닮을라믄 날마다 부처님 앞에서 절이나 해야지요.”
불교에 귀의한 지가 17년 되었다는 그녀. 기복에 얽매였던 지난 시절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 한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께 비는 것이 부족해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했다는 그녀. 하지만 인연이 닿은 큰스님의 설법을 듣고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그 전에는 기복을 다녔거든요. 울산 문수암 하면 다 알잖아요. 시댁 어른들 따라 기복을 다녔는데, 그 기 아이더라고요. 그래. 참 나를 찾는 공부를 시작한 지는 한 칠팔년 됐지요.”
‘기복’과 ‘참 나’라는 말에서 깊이가 느껴진다.
“여덟시에 와가지고 저기 석굴암까지 걸어가거든요. 그래 예불 마치고나면 이 시간 되지요.”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석굴암에 있는 부처를 뵌다고 하였다. 정성이 보통이 아니다. 매일 두 시간 이상을 걸어서 찾아가는 자기 안의 부처를 찾는 그녀. 그녀의 마음밭에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들이 보일 것만 같았다.
“한 법당에 가면 팔십 프로는 아니에요. 빈다고 있는데, 누구한테 빕니꺼.”
맞는 말이다. 제 안의 부처를 두고, 부처상을 향해 빌기만 한들 무엇이 이루어지랴. 세상의 인연치고 자기가 만들지 않은 것이 어디 있던가. 찬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