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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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교토 선림사소장 고려 아미타여래도
극락을 품은 아미타불
그림1
달님이시여
서방까지 가셔서
무량수불전에
일러 사뢰소서
서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두 손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 대원 이루실까

<삼국유사 권5 신주 : 광덕(廣德)의 원왕생가(願往生歌)>

밤하늘 달님에게 서방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의탁하여 읊은 노래입니다. 신라 문무왕 때 사문인 광덕이 지은 향가로 그는 아미타염불에 전념한 끝에 그의 염원대로 극락정토에 왕생했다지요.

서방극락정토를 주관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은 전생에 법장비구였습니다. 법장비구는 고통 속의 중생을 남김없이 구하기 전에는 차라리 성불하지 않겠다며, 사십팔 가지의 커다란 서원(48大願)을 세우고, 극락정토라는 낙원을 이루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법장은 영겁의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거듭한 끝에, 그 업력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극락세계를 건설하고 아미타불이 됩니다.

이러한 장엄한 아름다움을 한 몸에 품은 신비스런 아미타불(그림1, 고려말기 14세기추정, 교토 선림사소장)을, 필자는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의 유물창고에서 배견한 적이 있습니다. 검은 배경을 뒤로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여 푸른 연꽃을 탄 아미타불의 환영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환상적인 효과는 약 7백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남아있는 채도 높은 금선묘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이 아미타여래도는 여타 아미타여래도와는 무언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림2

근엄하면서도 존재감이 아주 강한 이 아미타 존상은, 매우 명상적이며 심오한 적멸(寂滅)의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 다른 아미타여래도와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붉은 납의(衲衣, 가사 또는 대의)는 둥근 원 문양으로 가득한데,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또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지름 5센티미터도 안되는 원문양은 생동감 넘치는 연꽃의 덩어리입니다(그림2). 연꽃 줄기는 힘차게 동심원의 넝쿨을 만들며 연속적으로 뻗어나오고 있습니다.

또 아미타불의 오른편 무릎을 덮은 납의 문양으로는, 국화ㆍ석류 등 여러 가지 화훼를 합해놓은 듯한, 현실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보상화(寶相華)가 포도송이와 같은 보주를 줄줄이 쏟아내며 풍요로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그림2). 아미타불의 오른쪽 어깨를 덮는 가사 밑으로는 녹색 복편의(覆偏衣) 자락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영기(靈氣)가 구름처럼 가득 피어오르고 이 속에서 금빛 봉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영기가 모여 봉황으로 화한 듯한 형상입니다(그림3).

그림3

이러한 디테일의 극적인 화려함은 깊은 고요함을 표방하는 아미타불의 외적 정적과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며,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황금의 땅, 천상의 음악, 흩날리는 꽃비, 극락조의 비상, 향기로운 미풍, 금모래가 비치는 영롱한 연못물 등의 묘사로 표현되는 극락정토의 아름다움을 여래의 한 몸 안에 다 품은 듯합니다.

유사 시기의 다른 아미타설법독존도는 본 작품과는 다르게 높은 육각형의 수미단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데, 이는 소위 당시 국제양식으로 통했던 중국 남송의 수도 항주를 중심으로 유행한 불화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본 작품은 기본 형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표현양식에 있어서도 타력(他力)과 자력(自力)이 만나는 유심정토(唯心淨土)를 표현한듯한 독특한 적멸의 분위기로, 유명한 서구방필(徐九方筆)의 수월관음도와 더불어 고려불화의 백미라 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이라는 여섯자 명호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민중과 가장 가까운 신앙으로 아미타신앙은 유행을 했었습니다. 마음을 모아 부르는 염불만으로 극락을 보장한다는 정토신앙은, 그 유래가 원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효는 화엄의 대가이지만 화엄사상과 더불어 정토사상을 그 양축으로 삼았습니다. 고려시대 불교개혁을 단행한 광종 역시 선교(禪敎)일치와 더불어 선종과 정토종의 합일을 꾀하는 선정(禪淨)일치을 추진했고, 고려후기 백련결사를 일으켰던 요세 역시 교학으로는 천태의 법화사상을, 실천적 신앙으로서 염불정토사상 채택하였습니다.

정토신앙은, 시대에 따라 민중을 포섭하는 방편으로서건 또는 실천적 수행으로서건, 화엄ㆍ 법화 또는 선종과 결합 또는 병행하여, 영원한 중생이 궁극의 염원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불교를 교학적 또는 철학적 학문이 아니라, 신앙으로 또 종교로 만드는 역할은 물론 이 정토신앙이 담당했겠지요.

그림4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꽃은 왜 피는가’에 대한 명제에 대해 그 생식적 기능이나 의미를 따지지 않고 ‘피기위해 핀다’라고 했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핀다면, 새는 먹이나 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기 위해 납니다’. 나는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성(佛性)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불국토를 ‘어떻게 장엄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 공기가 감미롭고, 흐르는 냇물의 투명함이 눈부시고, 풍경소리가 천상의 종소리로 울려 퍼지고, 생명력을 품은 신록과 각종 꽃과 나무와 새들이 아름답게 빛나 보인다면, 존재하는 것에 기능과 효용 또 이유를 달기보다는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청정한 마음으로 느낄 때, 우리는 이 사바세계 예토(穢土)에서도 정토(淨土)를 체험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석가모니는 젊었을 때 ‘인생은 고(苦)’라고 정의했지요. 하지만 그가 열반에 가까웠을 때, 그는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물들이는 장밋빛 노을을 바라보며 ‘인생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답니다.
강소연(미술사학자ㆍ홍익대학교 겸임교수) |
2007-04-04 오전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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