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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사하촌은 통도사 아래의 순지리와 통도사 뒤쪽의 지산리이다. 오후 세 시쯤 통도사에 도착해 절집을 둘러보고, 절 아래 마을인 순지리로 향했다. 사하촌이라고는 하지만 촌(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식당이요, 러브호텔이요, 술집이다. 어지간한 크기의 읍내보다 번화한 곳이다. 마을의 내력을 물어보러 이 사람 저 사람 붙들어보지만, “모립니더”라는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안내소에 문의를 했더니, 평산이나 지산리에 가면 더러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곳으로 갈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저 쪽으로 가서 구도로를 타고 가면 됩니더” 한다. 구도로가 어디 있는지, 알 턱은 없지만, 무작정 가리킨 방향으로 향한다.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오르니, 마을은 없고, “통도 환타지”라는 놀이동산이 나온다. 상가가 발달하다 유원지까지 생겼다. ‘통도환타지’를 지나 계속 나아가니, 어느새 도착한 곳은 통도사 나들목 부근이다.
‘행여 내가 길을 잘못 보았을까?’하는 생각에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그래도 없다. 다시 간다. 없다. 이번에는 통도사 나들목 인근에서 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짐작이 가는 마을길을 여러 군데 들어가 본다. 그래도 평산과 지산은 없다. 어둑어둑해진다. 우연히 낯선 마을 앞 버스정류소를 겸한 가게 주인에게 물었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쭉 가다 좌회전해서 쭉” 가라고 한다. 그때서야 이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길이 보인다. 마침내 평산 지산을 말해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도 숫제 음식점이다. 흑염소, 닭도리탕, 메기 매운탕, 돼지 갈비 등 메뉴도 다양하다. 마을을 찾기는 했지만, 선뜻 들어가서 마을의 내력을 물어볼 곳은 없다. 그새 밤이다. 취재를 마치고 늦게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마음을 접는다. 네댓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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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러 손두부 식당으로 향한다. “그 집 아주머니가 저 식당 하기 전에도 다른 식당에서 오래 일했다캤으니 좀 알 겁니더”라고 말하던 안내소 직원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니, 일하는 사람들은 말 건넬 틈 없이 바쁘다. 용건을 말했더니, “내가 뭐 아는 기 있어야지예”하면서 지금은 너무 바쁘다는 말을 덧붙인다. 식사를 하면서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홉시쯤 되어서 나타난 일하는 사람 하나가, “아저씨. 우리 문 닫을 시간입니더.” 그런다. 계산을 하러 놔왔더니, 주인 여자가 “아까 뭐 물어 보신다고 안 했어요?” 한다.
웃음이 나온다. 우리나라 삼보 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 통도사. 유명세 탓에 주위에는 장사꾼만 남은 것 같다. 그도 좋은 일이다,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살림이니.
다음 날, 또 하나의 사하촌인 지산리로 향한다. 평산 마을과 지산 마을이 따로 있지만 합쳐서 지산리라 칭한다. 영축산 바로 아래 위치한 마을. 마을 주위에는 드물지 않게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집들이 식당과 민박집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몇 집은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이다. 구판장 옆 노인정에 몇 사람이 모여 있다.
“한 바탱입니다.”
통도사와 마을과의 관계를 묻자, 김쌍연(71. 지산)할머니의 대답이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여기 마을에서 이 마을은 1반이고, 통도사는 3반이고 그랬다.”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그 전에 배급 같은 거 있을 때, 이장이 통도사 갖다 준다고, 3반에 간다고 그랬다.” 이화연(77. 지산)할머니의 말이었다.
“여기는 모립니다. 절이 오래 됐는지, 마을이 오래 됐는지. 그거 알만한 노인네들은 다 세상 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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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있던 마을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마을이 지금의 크기로 형성된 것은 50여년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스님들의 속가 몇 채가 있었고, ‘오막살이 쪼만 있었’다고 한다.
“50년쯤에 다 들어왔지. 전쟁 끝나고 피해 들온 사람 많지.” 김홍조(71. 평산)할아버지의 말이다. “옛날에는 통도사 땅이 많으니끼네 땅 빌어먹고 살 수 있어. 절이 있으먼 지아먹고 살 수 있어 들왔지.” 이화연 할머니의 말에, 땅이 평평한 곳이 많으니, 마음대로 개간하고 그랬겠다고 하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쪼매끔썩 (개간을) 해 가먼, (소작료를) 다 한 홉도 받아가고 두 홉도 받아가고 그랬지. 그래 세를 가져오락 한다니끼네.”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마을 말고는 다 절 산이라. 질 밟고 댕기는 것도 다 절 땅인데, 그래 길도 크게 못 넓힌다 아입니까.”
지금도 절 땅을 소작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니, “지금 누가 절 땅 질락하나. 다 회사 다녀뿔고 없어요.” “농토 이거 바라보고는 지 껏도 아닌데 뭐. 빌어먹기 딱 좋지.” 농촌의 현실이 아프게 담긴 대답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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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귀신 신정희
50여 년 명맥이 끊겼던 조선 사발을 재현시켜 1970년대 한국과 일본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신정희 선생의 작업실(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74번지)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다.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장작 가마와 무수히 쌓인 장작더미만이 도자기 굽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찾아간 작업실에 선생은 없었다. “왜 현판이 없대요?” 물었더니, 바쁘게 그릇을 싸고 있던 여자 분이 “다 알고 찾아오는데요”라고 대답했다.
방금 나갔다는 선생은 한 시간쯤 후에 나타났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1930년에 태어나 열여덟 살 때 우연히 한 시인이 준 청자사금파리 하나가 인연이 되어, 우리 그릇에 푹 빠져버렸다는 그릇 귀신. 그릇에 미쳐 밖으로만 떠도는 선생을 위해 집에서 굿을 세 번이나 했다는 그였다.
“이게 내 종교라.”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선생은 내게 차를 권했다. “30년 전에만 해도 그저 줘도 안 했어.”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선생의 사발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도자기들은 이미 국보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할아버지가 워낙 주는 것을 좋아 하시거든요.” 옆에 있던 제자가 덧붙인 말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이채롭다. 선생이 도제 교육을 통해 길러낸 제자는 아들 4형제를 비롯하여 30명 정도에 이르고, 전국 곳곳에 흩어져 각자의 작업을 하고 있는 그들을 가리켜 통칭 ‘申正熙家’라 한다.
벌써 70대 후반에 이른 나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는 선생이 걱정되어 지금도 작품 활동을 하시냐니까, 단호하게, “그럼 하지.” 그런다.
인사를 하고 나서 나오는 나를 배웅 나온 선생. 우중충한 하늘을 보고난 후 높게 쌓인 나무 더미를 가리키며, “이것을 왜 안 덮고 갔을까?” 나무에 비 들까봐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