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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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너른 품 속 각종 종교 발생-모악산 금산사
불교문화클러스트 사하촌을 가다-1
금산사 미륵전

산 이름은 모악산이요, 절 이름은 금산사이지만, 이름의 연원을 따져보면 모두 산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산의 옛 이름은 ‘엄뫼’, ‘큰뫼’였는데, ‘어머니산’이라는 이름이나, ‘큰산’이라는 이름이나 조선 고대의 산악숭배 사상이 반영된 이름이다. 이후 한자가 도입되면서 ‘엄뫼’는 ‘모악(母岳)’이 되었고, ‘큰뫼’는 ‘큰>큼>금’으로 음역하여 ‘금산’이 되었다고 한다.

큰 산인데다가 어머니 산이라서 모악산에서는 금만평야를 적시는 대부분의 물이 흘러나온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인 벽골제는 ‘벼의 골’ 즉 ‘볏골’인데, 우리나라 도작문화의 발상지를 모악산을 감싸고 있는 너른 들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모악산은 이른바 평지돌출형 산인데, 그 산의 품이 넓고 깊어 모악산에 들면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스해진다. 이곳이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발상지이다.

미륵하생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용화동을 미롯한 금산면 일대에서는 여러 신흥 종교가 탄생한다. 증산교를 시작으로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종파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한다. 민중들은 사회적 소외가 심해지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이런 민중들의 의식은 때로는 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메시아에 대한 염원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마을 입구 미륵상
먼저 절로 향한다. 미륵신앙의 모태인 미륵부처를 배알해야 하지 않겠는가. 겨울 차가운 물소리가 또랑또랑 귀를 씻는다. 주차장을 지나자 신험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미륵상이 있다. 조그마한 보호각 안에는 수십 개의 양초가 놓여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보호각 옆 나무 앞에도 많은 양초가 놓여있다. 토템의 흔적이다. 아니 나무마저 부처로 보고 기도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소리 들으며 절로 향한다. 날씨가 몹시 춥다. 손이 얼어붙는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분이 절에서 나온다. 미륵님 뵙고 가는 길이냐 했더니, 그렇다고 한다. “날마다 오시는 거에요?”라는 물음에 “야.” 하고는 부리나케 내려가 버린다. 이름이고 뭐고 물을 틈이 없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절마당에는 사람 그림자가 드물다. 오가는 몇도 그저 사진 찍기에만 열중이다. 사람이 대상을 보지 않고, 카메라가 대상을 본다. 사람은 자기 눈을 버리고 사각의 틀을 통해 대상을 본다.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기계가 주인인 셈이다.

미륵전에 들어간다. 미륵부처의 얼굴을 보는데 여러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신라의 고승인 진묵스님, 후백제의 진훤(견훤)왕, 조선의 혁명가 정여립, 김개남과 전봉준, 보천교의 차경석과 증산 강일순 등.

계단(戒壇)으로 향한다.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2개 밖에 없다는 계단, 방등계단이 그것이다. 계단은 계율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곳이다. 방등(方等)이라는 말엔 평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계단 아래에서서 절마당을 바라본다. 사람의 발자국이 몇 개의 길을 만들어 놓았다. 한 사람이 길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걸어가고 있다. 길 안도 길이고 길 밖에 길이 되는 마당이다.

용화동 일대 전경

절집을 나와 용화동으로 향한다. 금산사 사하촌은 좁혀 말하면, 용화동과 계룡, 금산 마을이고, 넓게 말하면 금산면 전체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용화동은 오래 되었고, 계룡은 박정희 대통령 때, 공비 소탕 한다고, 모악산 한두 집 있던 흩어진 독가촌을 다 철거해 들어온 집들이여. 스레트 집들이 다 그 때 들어온 집들이여.”

용화동에 산 지 50년이 되었다는 이창화옹(76. 용화동)은 마을들이 형성된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용화동은 언제 형성되었는지, 정확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번창한 것은 1871년 증산 강일순의 증산도가 들어오고부터라 한다. 증산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계룡은 두 마리가 있는데, 수컷은 충청도의 계룡산이요, 모악산 계룡봉은 암탉으로 진계(眞鷄)라 하였다. 증산 강일순의 후천개벽사상은 기아와 전쟁을 끊임없이 낳고 있는 근대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증산교 건물

금산저수지 위 구릿골에는 동곡약방이 있는데, 그곳은 강증산이 ‘천지굿’을 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강증산의 천지굿은 ‘죽임’을 일삼는 선천시대를 끝내고, 그동안 천대 받았던 여성성이 신이 되는, 세상의 어머니가 신으로 화하는 ‘살림’을 위한 후천개벽이었던 것이다.

증산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생소한 종교단체 건물들이 쉽게 눈에 띈다. 서백일교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계곡으로 향한다. 띄엄띄엄 흙집들이 보인다. 산 깊은 곳에 이르자 허술한 건물 한 채가 있다. 서백일이 살았다는 곳이다. 한 스님이 기도처로 쓰고 있다.

수많은 종교가 발생한 곳. 용화동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다. 금산교회이다. 기역자로 지은 기와집은 초기 교회 건물이다. 유교적 관습을 깨뜨릴 수 없어서 남자 신자와 여자 신자들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기위해 고안된 건물이다. 교회 안쪽에는 백년이 넘은 교회사와 관련된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참 종교가 많다. 불교는 물론 증산도에 보천교에 기독교에, 또 아직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종교도 꽤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마을은 평온하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꽤 많지만, 타인의 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다. 각자 또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용화동 일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미래 공동체의 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어머니 품안답다.


조말선 할머니
“다 미륵님 모시는 한 식구지 뭐”
- 조말선 할머니

“내 일생 미륵님을 믿응께, 그러지. 뒷산 어머니 산 아래 모다 사는 거여. 그런데 사는 기 형편 없어. 포도시 밥만 묵고. 친정은 경상도 하동. 노랑강 한려수도 거기는 내 친정 고지고, 쩌 청학동 살다 와부렀어. 청학동 일심교인이고, 진상교인이고, 다 미륵님 하나라.”

마을 사람 몇에게 “금산사 미륵불을 치성으로 모신 분이 있느냐?”고 했더니, 여러 사람의 입에서 해주 어머니라는 말이 나왔다. 평생을 금산사 미륵님 믿고 산다는 할머니(조말선. 78. 계룡). 해주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둘째 아들로 탱화를 그리는 아주 스님이다.

“사람이 좀 빈한하고 옹삭해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안 짓지. 되나캐나 함부로 사는 기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할머니는 혼자서 살고 있다. 자식들이 서울에 올라오라고 해도, “서울 사라 했다먼, 금산사 밑에 용화동에 와 산다나?”하는 말로 일언지하 거절을 하였다. 고향도 아니고, 시댁이 있는 곳도 아닌 용화동. 미륵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어 이사를 해 왔다한다.

“눈에 보이고 거기에 혹하고 그러면 도가 아니요. 이 길이 올바르냐? 지가 생각해서 가는 기지.”

기도 중이라 사진을 찍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을 거부할 수 없어서 난처해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홍학기. 70) 한 분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종교가 서로 다른 이들이건만, 그는 할머니댁의 보일러가 걱정이 되어 수시로 들른다고 하였다. 보일러실에 들어가 꼼꼼히 살피는 할아버지의 고향도 경상도이다. 그도 미륵님을 모시고 싶어 이곳으로 왔다 하였다.

“다 미륵님 모시는 한 식구지 뭐.” 할머니의 말이었다.
금산사= 이대흠(시인 본지 객원기자) |
2007-02-28 오전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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