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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리따운 천녀 하나가 유마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그림1). 그녀는 곧 대보살들과 대 제자들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꽃비를 내려습니다(그림2). 보살들의 몸에 내린 꽃잎들은 아래로 흘러 떨어졌지만, 대 제자들의 몸에 내린 꽃잎들은 그대로 붙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 제자들은 놀라 온갖 신통력으로 이를 떨쳐내려 했지만, 도무지 꽃잎들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유마경: 관중생품(觀衆生品)>’.
유마의 설법에 감동한 천녀가 문득 유마의 방에 등장하면서 그 방에는 가득 꽃비가 내렸습니다. 당황하여 몸에 달라붙은 꽃잎을 열심히 떨어내려는 사리불에게 천녀가 묻습니다. “왜 굳이 꽃잎을 떨쳐내려 하십니까?”
사리불은 “이 꽃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不如法)입니다. 출가수행자가 꽃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심히 부적절하기 때문이지요”라고 답합니다.
이때 천녀는 “꽃을 두고 ‘이것은 법이다(如法) 법이 아니다(不如法), 또는 부적절하다’라고 말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꽃 그 자체는 수행자인 당신에게 붙어있다 또는 아니다 라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 쪽이 부적절하다 라고 분별을 하니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별을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법이 아닌 것(不如法)이고, 분별을 하지 않는 경지, 그것이 바로 법(如法)이지요. 그러니 법이 아닌 것은 꽃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난처해진 사리불, 한갓 천녀에게 세존의 지혜제일이라고 불리는 유능한 제자 사리불이 가차없이 당하는 장면입니다. 떼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달라붙는 꽃잎 꽃잎들. 부정하면 할수록 또는 집착하면 할수록 끈질기게 따라오는 의식의 구렁텅이. 의식적 인식과 분별 또는 차별심을 훌쩍 벗어나 있는 보살들에게는 꽃잎 하나 붙어있지 않았지만, ‘나는 출가수행자이니 속인과 다르다, 나는 특별하고 우월하다, 그러니 이것은 적절하고 이것은 부적절하다, 이래야만 하고 저래야만 한다’라는 분별심을 아직 갖고 있는 제자들의 온몸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꽃이 붙으면 안된다’라는 바로 그러한 분별심의 작용으로, 정작 꽃이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꽃은 그냥 꽃일 따름’이라는 천녀의 말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인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가 상기되는군요.
즉 세상의 온갖 사물 및 대상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 또는 분별심이 없으나,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가치를 매겨줄 때,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을 할 때 비로소 그렇게 내가 인식한 대로 반응을 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한평생 우리 스스로가 편집적으로 만들어놓은 세상 속에, 즉 내가 본 눈으로, 내 생각으로, 내 인식으로 만들어놓은 환영의 세상 속에 푹 빠져서 울며 웃고 기뻐하고 겁내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또 치열하게 살다가 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세상은, 사물은, 또는 모든 대상은 그냥 그렇게 존재할 따름인데 말입니다. 말 그대로 꽃은 꽃이고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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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는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我相 나라는 생각, 人相 타인이라는 생각, 衆生相 중생이라는 생각, 壽者相 존재라는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다 또는 어떠해야만 한다는 의식적으로 만든 자아를 버릴 때, 진정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리불은 꽃을 떼어야 한다는 분별 자체가 커다란 집착을 초래하여, 결국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가두게 되는 꼴이 되었습니다. 자칫 그릇된 분별력을 키우면 키울수록 이는 편집적이 되어 결국 자신을 그 인식 속에 가두어 진퇴양난 속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 틈을 노리고 온갖 악령들이 달려듭니다. 생사윤회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색, 소리, 냄새, 맛, 촉감이라는 다섯 가지 욕망이 더욱 세차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욕망이 아무리 강해도 또 그로 인한 번뇌가 아무리 강해도 이는 결코 그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즉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의 늪에 길들여진 그 습관을 끊어낸 이에게는 꽃잎이 달라붙지 않겠지요.
떨어지는 꽃잎에 동요되지 않는 것, 무관심하여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인가 봅니다. 그리고 또 싸우지 않고 이겨야 이것이 진정한 승리이고요. 바로 진정한 현자는 말하지 않고도, 진정한 싸움꾼은 주먹을 보이지 않고도 이긴다지요.
본 그림(1)은 <유마경> 관중생품(觀衆生品)의 천녀가 막 유마거사의 방에 등장한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왼손에는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오른 손에는 꽃가지 한 송이를 맵시 있게 들고 서있습니다. 유마거사도 천녀도 모두 오른쪽(그림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을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유마거사가 문수보살과 그의 제자 무리들과 대담을 펼치고 있었다는 경전상의 정황으로 보아, 아마도 이 유마와 천녀에 대응하는 문수보살과 사리불이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짝으로 더 존재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본 작품은 그 필치가 너무나도 호방하고 유려하기에 이공린(북송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문인화가)의 작품으로도 칭송되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그림입니다. 보통 유마는 아름답고 반듯한 보살과는 대조되게 거친 거사(출가하지 않은 속세의 불교신자)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고졸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작품 속에서는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필치로 묘사되어 유마의 실상 높은 품격과 상서로운 기운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유마는 보통 어수룩한 속인 차림새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팔걸이에 한 팔을 걸치고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앉아 있습니다. 또 왼손에는 주미( 尾, 고라니 꼬리로 만든 먼지떨이, 이는 청담을 하던 신선 또는 불도들이 많이 지녔던 지물)를 가볍게 들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본 작품에도 나타나는 이러한 형식적 특징은 당(唐)나라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우리나라 석굴암의 유마와 문수보살의 좌상에서도 확인됩니다.(다음 연재21 그림3)
‘천녀여, 그대는 굳이 여성으로 남아있을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몸을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라는 계속되는 사리불의 역량 딸리는 질문에, 그녀는 사리불의 몸을 천녀 여성의 몸으로, 자신의 모습을 남성 사리불의 모습으로 맞바꾸어 버리는 신통력을 부려, 사리불 스스로에게 결국 존재의 본질에는 그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제 스타일 다 구긴 사리불은 체면불구하고 ‘깨달음은 언제 오는 것이냐’며 천녀에게 묻습니다. 그때 천녀는 ‘그대가 정작 범부와 다름없게 될 때’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잠시 동안의 천녀 출현으로 우리는 천녀의 정체와 나아가 유마의 진정한 정체까지, 얼핏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힌트를 받게 됩니다. 범부와 득도한 이는 하나, 거사와 여래는 하나, 바로 그 유명한 불이(不二)의 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