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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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속의 명장면](15)파주 보광사 ‘감로탱’(상)
참다운 진리의 기쁨 마음껏 맛보게 하리라

“먹어야겠다.”
싯타르타가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먹어야겠다’였습니다.

도무지 깨달음(열반)과는 점점 멀어지는 듯해서 조바심이 난 싯타르타는, 최후의 수행 방법으로 극단적 고행을 택했습니다. 장기간의 단식을 하고, 일부러 험한 바위에 앉아 참선을 하며 자신의 몸을 괴롭히고,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는 무거운 판석을 올려놓기까지 했답니다. 온갖 육체적 욕구에 반하는 금욕적 또는 자기 학대적 수행으로, 그는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내 손과 발은 풀과 같이 가늘어져 힘이 없고, 척추뼈의 울퉁불퉁한 굴곡이 다 드러났으며, 황폐한 집의 서까래가 썩어 내려앉듯 내 갈비뼈는 부수어져버렸다. 눈은 움푹 꺼져버려 마치 어두운 우물 속의 바닥과 같다. 몸을 스치기라도 하면 체모가 썩은 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 떨어진다.”

득도의 빛이 보이기는커녕,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극심한 암흑 속 절망입니다.

이 고행의 숲을 나온 싯타르타는 내란쟈라강에서 몸을 씻고, 강을 건너 저편을 가려 했습니다. 허약해진 그는 온 힘을 다했으나, 몇 번이고 미끄러 넘어져 강물에 휩쓸리면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강물은 석가의 무릎에도 못미치는 물이었다지요. 스스로를 참으로 한심하게 느낀 그는 “이 얕은 개울을 건널 힘도 없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저쪽 언덕(피안)으로 건네 줄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구할 힘도 없으면서 그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제 먹기로 합니다. 당시 인도 수행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단식수행을 버리기로 합니다. 바로 그때 싯타르타 앞에 나타나 따뜻한 우유죽을 보시한 사람이, 가장 처음 석가에게 귀의한 여성으로 일컬어지는 수쟈타입니다. 우유죽을 받아먹은 싯타르타의 몸엔 다시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하고, 메마른 육체에 불이 지펴지면서 그의 영혼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겠지요. 이를 먹고 체력을 회복한 석가는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 그가 그렇게 열망하던 생로병사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장기간 단식으로 허기졌던 그는 이 우유죽에서 다름 아닌 바로 ‘감로(甘露)’의 맛을 보았겠지요. 이렇게 내 속의 영혼을 일깨우는, 자성(自性)을 일깨우는, 또는 죽은 영혼까지 다시 살려낸다는 이 최고최상의 맛은 불교에서 감로(甘露, 감미로운 맛의 이슬)에 비유됩니다. 감로는 고대 인도 베다시대부터 ‘신(神)의 음료’로 알려져있던 것으로, 이를 마시면 영원히 죽지않는 불사(不死)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늘의 술(天酒)’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불로장생의 음료는 후에 불사열반(不死涅槃)에 비유되어, 불교에서는 열반(니르바나, 궁극의 깨달음 또는 해탈)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감로의 법문(法門)’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 법문의 자비로움을 ‘감로의 법우(法雨)’라고도 하지요. 석가모니가 득도 후, 고심 끝에 깨달은 바를 설법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한 말은 “내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 들으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였습니다.

이 당당한 말씀. 그는 자신의 설법으로 ‘감로의 문’을 연다고 했습니다. 고통 속 중생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다는 지극한 확신이 느껴집니다.

가는 여름이 아쉬워 서울 근교로 나가 파주 보광사(寶光寺)에 들렀습니다. 대웅보전 안의 좌측 영단(靈壇)에는 밝고 원색적인 색감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있는 감로탱(甘露幀, 광무2(1898)년 작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물론 감로탱의 주인공은 바로 ‘감로’. 보통 감로탱 그림 중심부의 제단에는, 이 감로에 해당하는 온갖 음식과 진귀한 과일의 성찬(盛饌)이 가득 차려져 있습니다. 꽃과 위패와 번(幡)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감로단(甘露壇)을 중심으로, 위로는 여래 및 보살의 무리, 그리고 아래로는 아귀를 비롯한 고통 속 중생의 무리가 포진됩니다.

즉, ①제단 위에 늘어선 막강한 일곱 여래의 가피력으로→②가운데의 공양 음식은 ‘법(法)의 감로’로 변하여→③그 은혜가 중생에기 두루 미치게 된다는 것. 이것이 감로탱의 기본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성찬이 이미 완벽하게 다 차려진 여타 감로탱과는 달리, 이 성대한 감로의식(우란분재)의 주인공인 ‘감로’가 이제 막 입장을 하는 장면입니다(그림1). 학수고대하던 성반(盛飯)이 영치기 영차 운반되어 옵니다(그림2). 일련의 스님들이 거대한 금빛 발우(어시발우)에 탐스럽게 담긴 성반을 조심스레 머리위로 받쳐들고 진입하자 제사장은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제단 바로 밑에는 이를 전달받아 올리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스님들이 릴레이 전달식으로 대기중입니다(그림3).

감로의 성반이 바야흐로 등장하여 이제 막 의례가 시작하려는 설레임의 광경을 그린 이러한 형식의 감로탱은, 이 작품 이외에도 특히 서울 및 경기지역 일대의 19세기말 작품(봉은사감로탱, 삼각산 청룡사감로탱, 백련사감로탱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하나의 초본(불화의 밑그림)이 당시 서울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차려진 제단이 있는 감로탱보다 이러한 형식의 감로탱은, 작품에 묘한 다이나믹함을 더하고 마치 현장 생중계를 보는듯한 생생한 활력감을 부여합니다. 이 새로운 형식의 감로탱을 창안해낸 화사(畵師)의 창의력이 돋보입니다.

운반되어오는 이 법(法)의 식사(즉 감로)는, 물론 우선적으로 우리의 육체적 허기를 채우기 위함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정신적 허기를 채우기 위한 방편(方便)입니다. “먼저 맛있는 음식으로 굶주림을 달래게 하고, 그 다음엔 참다운 진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리라”라는 약사여래의 12대원 중 한 서원과도 그 의미가 일맥상통하는군요. 즉 ‘참다운 진리의 기쁨의 맛’이란, 법희식(法喜食) 선열식(禪悅食)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끊임없는 욕망으로 항상 굶주려있는 우리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궁극의 만찬’은 바로 이 ‘감로’일까요. (계속)
강소연(미술사학자·홍익대 겸임교수) |
2006-09-15 오후 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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