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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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
“깨달음의 맑은 기운 감출 수 없어”

이월의 하늘은 눈 시리게 푸른빛이었다. 볼에 와 닿는 바람은 차갑고 산색은 아직 겨울 빛깔이다. 정혜사로 가는 길은 하늘 길처럼 까마득해 보였다. 천팔십 개의 돌계단을 지나야 한다. 백팔 번뇌를 버리고 또 버리어 열 번을 채우다 보면 정혜사 도량에 가 닿을 것이다. 덕숭산은 멀리서 보면 그 기상이 늠름한 것이 거세어 보이지만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보니 엄마 품속처럼 포근하다. 흘러내리던 계곡물이 그대로 멈추어선 채 얼어붙어있고, 소나무 아래엔 채 녹지 않은 흰 눈이 쌓여있는 아름다운 풍광은 떠나오기 전의 시공간을 잊게 만든다.

정혜사로 통하는 아치형의 바위 문을 통과하자 딱따구리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적막한 숲을 흔들었다.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정혜사도량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또 다른 성스러운 세계에 와 있음을 실감하였다.

창호문을 투과한 오후의 빛살은 투명했고, 그 넓은 공간을 퉁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며 달마대사가 지키고 있다. 덕숭총림 방장이신 설정 스님께 나붓이 예를 올렸다.
선객들 사이에 정혜사 선원은 방부들이기도 어렵지만 구참 스님들이 많아 공부하기도 힘들다고 소문이 나 있다. 그 어느 곳보다 정진의 열기가 뜨겁다는 말이기도 하다.

“소문이 잘못 났구먼. 어느 선방이든지 참선공부는 즐겁고 재미있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법을 깨달아 보겠다고 스스로 발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선방이고 스스로 인내하면서 극기하면서 서로를 북돋아주면서 공부하는 곳이 선방입니다. 참선공부는 최단의 극기와 자제, 인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디든지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참선공부는 재미있는 것이 아니고 진척이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기에 ‘본래 면목을 찾겠다’는 굳건한 원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공부입니다. 저는 자발적으로 강하게 공부할 것을 주문할 뿐입니다.”

경허 스님, 만공 스님을 배출한 수덕사는 한국 선종의 일번지이며 내려오는 가풍은 공부인들에겐 날선 지침이 된다. 선농일치라는 외형적인 가풍이 있으며, 내형적인 가풍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다 막고서 공부하라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가 바깥경계를 향해서 춤추지 않고 날뛰지 않도록 하고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막지 않고서는 공부할 수가 없어요. 좋다 나쁘다는 것도, 시시비비도 다 놓아버리고, 부처다 조사다는 그런 생각마저도 다 놓아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찾는데 전념하는 것이 가풍입니다.”
오롯이 마음공부하는데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 만든 것이고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은 변하지 않기에 마음공부가 으뜸공부인 것이다.

은사이신 원담 스님은 “해제했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라. 해제란 생사결단을 해야만 해제이다. 해제날인 오늘이 다시 시작하는 날이라 생각하고 발심을 해서 새로운 결제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상좌들에게 일렀다. 설정 스님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받았기에 365일이 안거요, 날마다 결제날인 것이다.


공부가 항상 여일하고 순일하였는지, 힘들 때가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여쭈었다.
“참선공부는 막히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고, 깨친 사람 외에는 모두 다 막혀있어요. 막혀있는데서 출발하는 것이고 막히지 않았다면 출발할 수 없습니다. 은산철벽과 같이 출구가 없는 당처에서 출발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공부를 해나가면서 잘 될 때도 있고 나태해질 때도 있지만, 공부는 원해 막힌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조사스님들의 행의처를 생각해 보고, 세상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참선하는 것이 말을 타고 달리듯 계속 달려가는 그런 상태가 아니기에 때로는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고, 육체적인 리듬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부단하게 가는 것입니다. 단절하지 않고 물이 흘러가듯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선공부는 한 고비 넘기고 나면 이것만큼 맛있는 공부가 없으며,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퇴진하지 않습니다. 선은 함이 없는 공부이며 선을 하는 사람은 둔(鈍) 공부를 해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하는 공부인 것이지 계산 빠르고 그런 사람은 선공부를 할 수 없어요. 참선공부가 힘들고 어려운 것 같지만 한 고비 넘기고 나면 ‘사람들이 참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구나. 이 일을 제쳐놓고 왜 다른 일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禪)이 중생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했더니 한마디로 단단하게 “의심하지 말라”고 일렀다.
“불교에서 ‘성불하자’는 것은 자기 본성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불교인만이 가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가야 할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들에게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준대로 공부한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아름답고 감사하고 행복한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잘 알기만 해도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요. 불교는 특정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만중생에게 만생물에게 해탈의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불교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고통의 길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행복해야 하고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믿고 안믿고는 중생의 근기이지만 믿기만 하면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이 선입니다.”


눈이 일체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하여도 눈 자체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외부세계는 환하게 보고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내면세계는 잘 모르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 중생들이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선이며, 선을 통해 자기 본성을 회복하여 주인공으로 살라는 것이다.
설정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깨달음 혹은 견성’이란 어떤 것인지 여쭈었다.
“분별심이 없는 것,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견성입니다. 청정한 불성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데 중생들은 분별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높다 낮다, 좋다 나쁘다, 귀하다 천하다, 나와 너, 이렇게 갈라지고부터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증오심과 진에심(瞋?心)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런 분별심과 진에심이 생기는데서 윤회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생사의 윤회를 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견성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견성이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없는 보배창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을 찾는 것이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변견이 떨어지고 난 다음엔 무엇을 해도 다 괜찮아요.”

‘변견이 다 떨어지고 난 다음엔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임제선사의 “만약 어떤 장소에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는 곳은 모두 참된 곳일 것이며 어떠한 경계에서도 잘못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 보았다.
선가에서는 ‘왜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하면 마구니로 몰아가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더니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지요”라고 답했다.
“깨달음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상이 없는 것이기에 깨달았다느니 깨닫지 못했다느니 하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가 드러내지 않아도 그 사람의 심성과 품성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향기를 감출 수 없듯이 깨달음의 맑은 기운 또한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간화선이 세계적인 선수행으로 각광받을 수 있을지를 여쭈었다.
“각광받을 수 있을지 그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기 전에 만 중생이 선(禪)속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선은 모든 중생이 가야 할 길이지 불교의 길만이 아닙니다. 간화선을 세계화시키는 것은 불자들의 할 일입니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가 넘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혼란을 겪고 있으며 온통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어요. 대부분의 학자들이 진단하기를 현대인의 60% 이상이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요. 이 정신질환을 바르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은 모든 사람들이 가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불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지혜의 눈이 떠지게 되면 굳이 이것을 누구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가르치게 됩니다.”


재가불자들이 좀 더 쉽게 선수행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 내지는 비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여쭈었다.
“간화선에는 왕도가 없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간화선은 재미가 없는 공부인데 한고비만 넘기면 재미가 있어요. 선을 하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으며, 일상생활 속에 선이 다 있습니다. 꼭 앉아야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순간에도 다 할 수 있어요. 앉아서도 서서도 밥 먹을 때도 걸을 때도 생활 속에서 선을 하는 습관을 그렇게 들이면 쓸데없는데 자기 에너지를 쏟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에너지를 쓸데없는데 소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열정을 갖고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선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철학은 하루를 경영하고 사상은 내일을 경영하고 종교라고 하는 특히 선은 영원을 경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자기 생명을 경영해서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이 선입니다. 영원의 농사를 짓는데 단시일에 효과를 보려고 해서 되겠어요? 차분히 한순간 한순간 하다보면 그것이 쌓여서 자리가 잡히고 선의 참맛을 알아가게 됩니다.”
스님은 고령화시대의 대안으로도 선수행을 꼽았다. 연세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하고 무능한 삶으로 전락하지 않고 끝끝내 자기를 지키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참선이란다.


현대불교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운문선사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공안을 남겼는데, 날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와 허공이라는 공(空)으로 되어있습니다. 지(地)는 인간의 오만, 수(水)는 분노, 화(火)는 탐욕, 풍(風)은 시기질투, 공(空)은 무지입니다 중생의 삶은 이 다섯 가지를 진짜로 알고 신나게 살고 있어요. 오만을 가져본들, 분노를 일으켜 본들 탐욕을 부려본들, 그것이 무엇에 쓰일 것인가를 알지 못해서 중생이 어리석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좀 내려놓고 살면 행복한데 이러한 것을 끌어안고 살면 불행해집니다. 일일호시일이 되도록 살아야지, 일일악시일이 되도록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처님 법은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어요. 중생 노릇하면서 복이 오라고 하니까 복이 오지 않는 것이지, 부처 노릇하면 복이 절로 옵니다.”

선의 종장이신 설정 스님께서 전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가르침’을 오롯이 가슴에 새길 일이다. 딱따구리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서 천팔십 개의 계단을 되짚어 산을 내려왔다.
문윤정 수필가(본지 객원 기자) | blueyon6@hanafos.com
2011-04-24 오전 1:48:00
 
한마디
관문 설종스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에 사진으로만이라도 뵈니 기쁩니다. 어느듯 눈섭이 백발로 머무 셨습니다.고고한 모습 한결 같으시길 바랍니다.
(2011-05-02 오후 5: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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