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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아파트와 달동네 민가, 숲이 어우러진 서울 정릉의 삼각산 기슭. 며칠간 내린 눈으로 하얗게 단장된 풍경은 눈에 익은 동양화를 보는듯 하다. 마을과 산이 연이은 산중턱에 자리잡은 보림선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소금이 뿌려져 있다. 신도들이 행여나 눈길에 미끄러질까 배려한 마음이 느껴진다.
한국의 유마 거사로 불린 백봉 김기추(白峯 金基秋, 1908∼1985) 거사의 제자들로 구성된 보림회의 근본도량으로 잘 알려진 보림선원. 이곳에는 한국 현대불교의 산 증인인 묵산 스님이 구순(九旬)의 고령에도 자상하게 출ㆍ재가 선객들을 지도하고 있다.
도량에 들어서서 묵산 스님이 계신 요사채로 가니 처마 밑에 비둘기 한 쌍이 햇볕을 쬐며 졸고 있다. 인기척이 느껴질 법한데도 전혀 도망갈 기색 없이 편안한 모양새가 이곳에는 해칠 사람이 없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조실방에 들어서니 묵산 스님이 반갑게 맞으셨다.
“날도 추운데, 뭐하러 왔어. 앉으시오.”
스님은 워낙 고령이라 동작이 좀 느렸지만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다. 스님이 귀가 어두워진 탓에 미리 질문지를 준비해 보여드리는 방식으로 대담을 진행했다.
묵산 스님은 마침, <반야심경>을 새롭게 번역해서 해설하는 원고를 집필중이셨다. 200자 원고지에 한자와 한글을 병기한 작은 글씨가 아흔의 세수를 의심케 한다.
“올해 세수가 구순이신데, 건강비결이 따로 있으신지요? 오래도록 건강하셔서 많은 불자들에게 법을 설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글을 보여드리자, 스님은 미리 준비해 둔 백지에 펜으로 한시를 쓰기 시작했다.
月曜長空萬古同(월요장공만고동)
火曜光明天一色(화요광명천일색)
水曜洗情永淸淨(수요세정영청정)
木曜靑山流水洞(목요청산유수동)
金曜乾坤玄幽通(금요건곤현유통)
土曜石佛放光明(토요석불방광명)
日曜東方紅日出(일요동방홍일출)
‘월요일은 만고의 머나 먼 허공과 하나 되고/ 화요일은 광명이 하늘을 덮는다/ 수요일은 망정을 씻어 영원한 청정을 이루고/ 목요일은 청산에 흐르는 물이어라/ 금요일은 하늘과 땅이 그윽하게 통하고/ 토요일은 석불이 빛을 발하며/ 일요일은 동방에 붉은 해가 솟는다.’
매일매일 자연과 하나 되어 깨달음의 삶을 누리는 것이 건강비결이라면 비결이란 뜻인가? 어릴 적부터 약골이었던 스님은 14세부터 27세까지 각혈이 멈추지 않아 병을 고치기 위해 일념으로 관음정근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전 고관사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거짓말처럼 병이 나아 본격적으로 출가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 현재 보림선원 야외법당에 조성된 커다란 관세음보살상은 젊은 시절 병고에서 벗어나게 한 ‘자성(自性)의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시절이 하수상한지라, 세간의 일을 들어 본격적인 법문을 청했다.
“나라가 구제역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남북 당국은 대결국면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구제역 발생의 원인은 위생문제가 주요한 원인이지만, 크게 보면 인과를 소홀히 한 인과응보라 생각합니다. 소나 돼지와 같은 축생(畜生)을 가둬 놓고 좋지 않은 음식을 먹인 결과이죠. 인과의 원리는 불교를 초월해서 전 세계적인 문제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남북간의 갈등 역시 인과의 도리로 풀어가야 합니다. 전쟁으로는 민족 모두의 안녕을 찾을 수 없다는 교훈을 자각해야지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우면서 함께 손을 잡고 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상호간에 절대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지구적인 이상기후 속에 서민경제도 어려워 세간 속에 사는 일이 고난의 연속인듯 합니다. 사람들이 온갖 경계 속에서도 여여(如如)하게 살 수 있는 방편을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각자 분수를 지키고 본분을 지켜서 서로 이해하고 양심을 갖고 살아야만 이웃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화목한 세상이 됩니다. 남을 괴롭히고 살육하려는 투쟁심으로는 절대 사회의 안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국민이 편안하고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게 없습니다. 축생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따뜻하고 배부르게 아껴주고 사랑하는 마음이면 되는 것입니다.”
“어묵동정 행주좌와 가운데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의 발전을 이루는 핵심은 덕(德)을 닦고 지키는 데 있습니다. 아울러 도(道)를 닦는다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힘을 써봐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와 덕으로써 모든 정치와 경제적인 안정이 도모 되었지, 물질과 과학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지키고 도를 닦아나가는 평상심(平常心: 시비ㆍ분별과 번뇌ㆍ망상이 없는 무심)의 생활을 해야 마침내 경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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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오랜 구도의 과정에서 특히 기억나는 일화를 말씀해 달라고 청을 드리자, 스님은 눈에 그리듯 생생하면서도 간결하게 말씀하신다.
“1950년 6ㆍ25동란 때 전라도 황룡사에서 지일화(池一華) 도인스님을 만나 <금강경>을 90일 동안 배워, 만법이 공(空)한 도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후 20대 초반에 백봉 도인을 만났는데,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무엇이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입니까?’
‘거, 담배 한 대 주시오.’
나는 이렇게 대답을 했지요. 그후 삼각산 토굴에서 혼자 공부를 한 후 백봉 거사의 인정을 받은 것이 보람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법사이신 인곡 큰스님은 산 짐승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자비보살로 알려져 있는데, 어떠한 가르침을 받으셨는지요?”
“인곡 큰스님은 고창 출신의 대도인이셨지요. 처음 해인사에서 뵙고 제자 될 것을 간절히 원했는데, 절대 사양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원을 세우고 사흘을 찾아뵙고 간곡히 말씀드렸더니 장경각으로 올라오라 하시더군요. 거기서 법문을 해주시면서 ‘사고원래여인주(師姑元來女人做)’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셨지요.”
‘사고원래여인주’ 공안은 조주 선사와 연관된 선화(禪話)에 등장한다. 한 학인스님이 조주 스님 회상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늦은 밤에 ‘무(無)자’ 화두를 깨쳤다고 도량에서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그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친 조주 선사가 대중에게 간밤에 소란을 피운 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자 가장 말석에 앉은 행자가 이실직고(以實直告) 했다. 조주 선사는 학인을 점검하려고 질문을 던졌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나이 많은 비구니는 여인입니다.”
이 대답에 조주 선사가 학인을 인가한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물론, 인곡 스님에게 이 화두를 받을 당시, 묵산 스님은 전혀 뜻을 알지 못해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오랜 세월 참구할 수 밖에 없었다.
묵산 스님은 한창 발심이 나서 공부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펜을 들어 다시 백지에 한시를 적는다.
多年山中覓鯨魚(다년산중멱경어)
添得重重碍膺物(첨득중중애응물)
暗夜精進月出東(암야정진월출동)
忽然擊碎虛空骨(홀연격쇄허공골)
스승 인곡 스님의 오도송을 그 오랜세월 동안 한 글자도 잊지 않고 즉석에서 써내려갔다. ‘오랫동안 산중에서 고래고기를 찾는데/ 점점 거듭거듭 물질에 막혀 답답하더라/ 어둔 밤 정진하는데 달이 동쪽으로 떠오르니/ 홀연, 허공의 뼈를 쳐부수도다.’ 이런 뜻이다. 묵산 스님은 산짐승들도 인곡 스님을 겁내지 않은 정도로 대도인이었다며 거듭 스승을 찬탄했다.
그러나 묵산 스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지식은 바로 백봉 거사였다. 대구, 부산,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탁발하고 염불정근을 하면서 부처님 법을 전하다가, 1975년 서울 정릉4동 북한산 자락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선방을 만든 것은 백봉 거사를 모시고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백봉 거사를 대도인이라 느껴서 친견한 뒤 ‘허공이 하나이니, 지도리(樞: 사물의 근본)도 하나이며 생명도 하나’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我)와 법(法)이 모두 공하다(俱空)는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기복으로 흘렀을지도 모르니, 그 은혜가 참으로 지중합니다. 백봉 거사님의 선시집과 <절대성과 상대성>이란 책을 발간해서 대중에게 보시한 일이 큰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비록 거사의 신분임에도 진리를 배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따로 없었던 묵산 스님은 평생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에 대한 당신의 안목을 <금강경 노래>로 지어 백봉 거사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당신의 깨달은 심경을 선시(禪詩)로 지어 백봉 거사의 인가를 받았다며, 직접 백지 위에 써주었다.
無面目者是本然(무면목자시본연)
頭頭物物從此來(두두물물종차래)
秋月春花君知否(추월춘화군지비)
石女吹笛木人舞(석녀취적목인무)
‘얼굴 없는 자, 이것이 본래 이러하다. 두두물물이 이리로 좇아 왔다. 가을달 봄꽃을 그대는 아는가. 돌여인은 젓대를 부는데 나무사람은 춤을 춘다.’
구십 평생의 살림살이가 이 노래에 담겨 있으니, 추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게송에서 돌여인이 피리를 불고 목인이 춤을 추는 것은 우리 ‘본래의 얼굴(本來面目)’인 법신(法身)의 무심(無心)한 묘용을 뜻하는 것입니까?”
묵산 스님은 깨침은 자득(自得)하는 것이기에 구구한 설명은 쓸 모 없다는듯 간단한 사족(蛇足)으로 답을 대신했다.
“만물이 마음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만물이고 만물이 마음이니, 둘이 아닙니다.”
필담(筆談)을 섞어 가며 나눈 대화임에도 1시간 30분 여의 문답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척하면 삼척’이라고 10여 개의 질문지를 읽고 즉답한 대담은 연로하신 스님의 건강을 고려해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해야 했다.
“큰스님, 끝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불자들과 스님들에게 바른 마음공부의 자세를 일러주십시오.”
“물질에만 쏠리지 말고 자기 본래면목을 걷어잡고 열심히 인생문제를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복불교는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절 마당으로 나오니, 날개를 다친 한 비둘기가 햇볕이 내리쬐는 눈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도량 안의 비둘기들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데, 절 밖에 나가면 다시 사람들을 경계할 것이다.
갈등이 그칠 날이 없는 세간 속에서도 참다운 자유와 평화가 실현되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그것은 결국 각자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으리라. 사람들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해져 모두 하나가 될 때 지구별 위에서도 불국토가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란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묵산 스님은
192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40년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43년 광명사에서 금륜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44년 만암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59년 해인사에서 인곡 스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해인사 보문사 수덕사 칠불암을 비롯해 오대산 등지의 선원에서 70세까지 수행정진했다. 75년 서울 정릉에 보림사를 창건했으며, 90세의 고령에도 찾아오는 출ㆍ재가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