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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소년이 어머니를 잃었다. 초등학교 방과 후 천진하게 골목을 뛰어들던 소년은 집 대문에 다다랐을 때 집밖으로 새어나온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를 잃고 소년에게는 많은 것이 변했다. 계모와 이복동생이 생겼다. 친척들은 점점 소년을 싸늘하게 대했다. 소년은 그때 처음 중생의 고통이 무엇인지, 소중한 사람을 잃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어린 소년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나무하고 물 긷는 틈틈이 글자만 보이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런 소년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어느 날 할머니가 소년에게 말했다.
“공부하고 싶으면 절에 가 보거라.”
소년의 나이 15세였다. 소년은 공부가 하고 싶어 출가를 결심했다. 소년은 남해 망운암을 찾아 스님이 됐다.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소년은 성장했다. 하고 싶던 공부도 원 없이 했다. 중국 유학길에 올라 박사학위도 받아왔다. 귀국한 그는 모교 동국대에서 교수가 됐다. 열과 성을 다해 강의를 하고 제자를 길러냈다. 어느덧 소년은 노스님이 돼버렸다. 소년이 스님된 지 50년, 동국대에서 25년을 지났다. 이제 2월이면 그는 강단을 떠난다. 그는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 교수 법산 스님이다.
2011년 새해를 앞둔 어느 날, 동국대 교수회관의 법산 스님 연구실이다. 스님이 차를 따른다.
“학문을 오래하다 보니 수행[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디다. 이론은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과 같거든요. 모래를 아무리 쪄봅시다. 밥이 될 수 있나.”
법산 스님은 노년의 자신을 경책케 한 이 절실한 깨달음을 정년퇴임 기념 학술세미나 주제로도 삼았다. 구랍 10일 동국대에서 ‘불교와 수행’을 주제로 열렸던 아태불교문화연구원 제2차 학술대회가 그것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수행 주제의 논문 5편이 인경 스님 등 스님의 지도제자들이 주축이 돼 발표됐다.
스님은 “25년간 교육자로서 학교에 머물며 자리를 지켜온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올바른 수행풍토를 확립하고 수행체계로 바로 세워야 학문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생각에 퇴임을 앞둔 마지막 학술대회 주제를 ‘불교와 수행’으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정년을 앞둔 노교수가 돌이켜보니 종교가 신념이라면 학문은 이론에 지나지 않았다. 노교수 이전에 출가자였던 법산 스님은 자신의 본분사를 지키기 위해 최근 수년간 방학이면 선방을 찾아 방부를 들이기도 했다.
“깨달음은 본래 진여자성 자리를 깨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絶處逢生(절처봉생)’이라고 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완전히 막다른 곳에서 딱 끊어지고 깨어져야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스님은 이것이 선기(禪機)라 했다. 또, 금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부딪히고 부딪히다 보면 어느 순간 깨지고 터지며 감춰졌던 보물이 드러나는 것이라고도 했다.
법산 스님은 나그네에게 “티베트 만다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있다”고 답했다.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만다라는 모래를 한 알 한 알 뿌려가며 만들어진다. 그것이 완성되면 불성의 세계가 그림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만다라는 완성된 후 사막의 신기루가 사라지듯 흐트러지고 지워져 사라지고 만다.
“만다라를 그대로 두고 보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라고 했습니다. 맨 꼭대기에 올랐더라도 만족하지 말고 다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어야 합니다.”
스님은 깨달음에도 집착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만다라에 비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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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궁극적 지향은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식(識)이 변화한 후에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식은 그냥 바뀌지 않습니다.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들 흔히 말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수행을 해야 식이 전환될 수 있습니다.”
‘전식’의 전(轉)은 ‘굴린다’는 뜻이다. 스님은 이것을 “구른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유식과 중관에서 각각 말하는 전(轉)과 파(破)는 같은 의미이다”라고 설명했다.
“식을 바꾸는 것은 이전의 식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고집, 집착이지요. 수행은 고착된 고집을 깨뜨리는 과정입니다.”
노랑안경을 쓴 사람은 세상이 노랗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정말 노랗게 물든 것은 아니다. 안경을 벗어야 제대로 된 세상을 볼 수 있듯 사람들도 똑같다. 노랑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내 고집으로 세상을 보는 것 무엇이 다를까? 스님은 “물든 껍질을 깨고 벗어나는 것이 수행이고, 깨침이다”라고 강조했다.
깨고 벗어나기 위해 스님은 “자기 고집, 나라는 생각부터 조복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금강경>의 ‘항복기심(降伏其心: 그 마음을 항복 받음)’, <법화경>의 ‘절복기심(折伏其心: 그 마음을 절복 받음)’, <화엄경>의 ‘조복기심(調伏其心: 그 마음을 조복 받음)’ 모두 마음 수행을 달리 표현한 것들이다.
법산 스님은 “부처님의 8만 4000법문이 담긴 대장경 전체가 수행지침서이다. 어떤 경전이든 부지런히 읽고 또 읽고, 새기고 새기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 날, 스님은 S전자 임원과 점심공양을 했다고 했다. 공양을 하며 스님은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현재 기술은 로봇에 여러 지식을 입력하면, 로봇이 이것을 토대로 응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프로그래밍된 지식을 응용하면서 로봇에게도 업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로봇의 사고회로를 인간의 두뇌를 벤치마킹해 만들다보니 로봇에게도 업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로봇도 성불할 수 있을까?
“<금강경>에 긍정에도,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긍정ㆍ부정 모든 것을 여읜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대웅전 주련마다 쓰여진 글귀가 있다.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 불신은 법계에 충만해 널리 일체 중생 앞에 나투고)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수연도감비부주 아항처차보리좌: 인연 따라 감응하며 미치지 못함 없이 항상 이 보리좌에 머문다).” <화엄경> 여래현상품의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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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산 스님은 “중생 각각에 불성이 있어 삼각산, 지리산, 종로 어디에 있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찾았을 때 부처님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내가 인연 지었을 때 부처님은 내 곁에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항상 앉고 눕고 서고 행동하는 자리가 바로 부처님을 만나는 깨달음의 자리이다. 수행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법산 스님은 자신의 법문에 끄달리지 않기를 당부했다.
“찻잔은 차를 마시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숟가락은 국 마시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찻잔은 차맛을 모르고 숟가락은 국맛을 모릅니다. 언어란 이와 같습니다. 수단이지 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육조단경>에서는 불법은 세간에 있다고 했다. 세간을 떠나 불법을 찾는 것은 토끼 뿔을 찾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말과 글 속에서 깨달음을 쫒는 것 또한 토끼 뿔을 찾는 것과 같다.
일생을 남에게 글만 가르치던 스님이 선방을 찾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젊어서는 참선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에서 찾았으나 이제는 달랐다. 법산 스님은 “경전ㆍ어록을 읽으며 익은 생각을 버리는 수행을 했다.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수행법입니다. 의심이 자꾸 자꾸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높은 벽을 무너뜨릴 힘이 쌓이게 됩니다. 은산철벽이 턱!하고 무너진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은산철벽은 바로 ‘나’라는 생각, 집착과 아집을 뜻합니다. 미련한 고집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미혹에 갇혀 중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벽송선원에서 수행하던 스님은 어느 날 아침, 지리산 천왕봉서 쏟아지는 햇살과 산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매일 보던 모습은 그날따라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 때의 느낌을 스님은 시(詩)로 읊기도 했다. (법산 스님은 최근 <문학공간>에서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법산 스님은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항상 현재에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은 게으름이 가장 큰 병이라며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하며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자기를 비춘다는데 ‘거울’을 예로 들어볼까요?”
스님은 거울에는 모든 것을 비추고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 이유를 공(空)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울 보고 성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고맙다는 사람도 없어요. 그저 거울을 보고 그곳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칠 뿐입니다. 사실은 고마운 일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공덕을 받음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울은 형상이 없다. 단지 틀만 있을 뿐.
법산 스님은 다시 모래 이야기를 꺼냈다. “학문은 모래알 같으나, 모래 알갱이를 녹여서 첨단과학에 없어서는 안 될 반도체를 만든다. 강바닥에 널린 하찮은 모래가 지식의 저장창고인 반도체이다.”
스님은 모래가 반도체가 되려면 자신의 몸을 녹여 환골탈태하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수행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게 있어 환경 변화는 수행의 새로운 전환기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그랬고, 대만 유학길에 올랐을 때가 그랬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참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법산 스님은 던져진 환경에 충실하고자 힘썼다. 순간순간 닥치는 환경에 빠져들고자 했다. 원융한 삶 속에서 스님은 학업을 이뤘고, 교수가 됐다. 수행을 했고 큰스님이 됐다.
환경에 녹아드는 삶에 대해 스님은 말했다. “부처님이 대기설법하며 임기응변 한 이치를 보세요. 부처님은 타자(他者)와 동질성을 찾아 이끌면서 변화를 꾀했습니다. 그냥 무작정 바꾸려 한다면 누가, 무엇이 바뀌겠습니까? 갈등과 고통만이 남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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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했다. 법산 스님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가르침을 얻는지가 평상심과 도를 논하는 핵심이라고 했다. “알아차림(sati)도 생활 속에서 알아차림 하라는 것입니다. 선가에서는 ‘성성적적(惺惺寂寂)’ 혹은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고 말합니다. <영가집>에는 위빠사나를 성성적적으로, 사마타를 적적성성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만 적적은 사마타(고요함, 止)를, 성성은 위빠사나(알아차림, 觀)를 말합니다. 순서야 어찌됐든 정혜쌍수(定慧雙修)해야 합니다.”
법산 스님은 “학교에서 25년을 지냈어도 한 번도 수행자라는 생각을 잊은 적은 없다. 강의 역시 수행하러 들어가는 것”이라 말했다. 스님의 수업은 학부ㆍ대학원 수업할 것 없이 매 시작 전 죽비로 시작해, 수업의 끝을 죽비로 알린다.
스님은 “학생을 도반으로 생각하고 매 수업시간을 바로 정진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것과 저것이 상의상존하는 연기는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까닭이었다.
법산 스님의 지도제자는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인경 스님, 동국대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화랑 스님 등 박사만 10여 명이다. 석사과정은 셀 수 없이 많다.
법산 스님은 “내 앞으로 이름을 건 제자라고 해서 특별히 대해준 것은 없다. 내 강의를 듣고, 내게 배운 학생은 모두 내 제자이다”라고 말했다. 스님에게 제자들은 모두 나 아닌 ‘나’였다.
법산 스님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도철학을 섭렵할 것을 강조했다. 신묘년 새해를 맞아서는 3ㆍ7ㆍ100일 기도하듯 새해 첫날은 기도로 한해를 열자고 당부했다.
“지난해까지 가졌던 생각을 확 뒤집어 인식을 바꿔봅시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새로운 생각 신심 용기 지혜로 새해를 열면 한해가 분명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법산 스님은 1987년 법정ㆍ현호 스님, 박성배 교수 등과 보조사상연구원을 설립한 국내 보조선 권위자이다.
스님은 1945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해 남해 망운암에서 덕산 스님에게 출가했다. 1968년 경봉 스님을 만나 건당할 때까지 젊은 시절을 남해 화방사, 고성 옥천사 등에서 수행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발산했다. 탄허 스님을 통해 내전을 전수 받은 스님은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스님은 학위논문 <보조선의 연구>로 대만 중국문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불교문화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 동국대 선학과 교수이다. 동국대 정각원장을 13년간 지내는 동안에는 1988년 교수불자회를 비롯해 직원불자회인 보현회, 여직원불자회인 관음회, 기능직불자회인 정심회 등을 설립해 동국대 구성원의 신행 생활을 체계화했다. 또, 스님은 한국선학회장, 한국정토학회장, 조계종 고시위원장 등을 거치고 현재는 보조사상연구원장, 인도철학회장, 아태불교문화원장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