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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이 분분히 내리는 날, 정릉골짜기를 찾았다. 흰 나비처럼 허공을 날아오르던 하얀 눈은 나무 위에 쌓이지 않는다. 나목을 비롯하여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정릉골짜기에 금빛 바람이 불고 흰빛으로 빛나는 풍광을 상상해 보았다.
시간에 녹아 사라지는 것이냐/ 잠시 쌓이다가 눈이 부시다가/ 어느덧 물이 되는 덧없는 흰 눈//그렇구나!/한 다발 꽃을 들고/ 웃고 있는 너도 흰 눈/무너진 돌담에 기대어/울고 있는 나도 흰 눈// 인생은 모두가, 모두가 흰 눈.
청화 스님의 시 <흰 눈> 전문이다. 육각형의 결정체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눈은 종내는 녹아서 물이 되는 덧없음을 노래하면서 인생 또한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인생이란 흰 눈처럼 덧없는 것이니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포근하고 넓은 마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읽었다.
낡은 목현판에 써진 ‘청암사’라는 글자를 보고 사찰임을 알 수 있었다. 여염집과 다름없는 청암사 뜰엔 작은 석등이 하나 서 있을 뿐, 사찰의 상징물이라고는 없었다. 청화 스님의 청빈과 검소함을 단청으로 삼은 절이다. 소박한 스님의 처소엔 다양한 장르의 서책들이 한 벽면을 채우고 있다.
서책들을 둘러보면서 청화 스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스님은 등단 31년 만에 시집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세상에 내놓았다. 조계종 교육원장 소임을 마치고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시(詩)를 마음껏 쓰는 것’이라 했다. 한 때의 열병처럼 스쳐지나가지 않고 평생을 두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두고 청화 스님은 ‘전생의 업’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면서 웃었다.
소년시절부터 사랑방에 굴러다니는 책을 보면서 문학에 매료되었다. 소설을 읽으면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시를 읽으면 시인이 되고 싶었다. 소년시절부터 굉장히 감성적이었고, 계절의 변화에 예민하고 섬세하였다. 이러한 아이의 감수성을 조금이라도 아는 부모라면 무언가 뒷바라지를 했을 터인데 주변 환경은 그러지 못했다. 한학을 공부했던 아버지는 사회진출을 꿈꾸었지만 지독한 좌절을 맛보았고, 아버지는 ‘공부 같은 것은 별 소용없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아버지는 식견(識見)이란 오히려 농사를 짓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소년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문학에 들떠 있던 소년은 신식 공부를 하고 싶었고 끊임없이 읽고 싶고, 쓰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 짬을 내어 책을 읽기 위해 호롱불이라도 켤라치면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주변 환경이 소년을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스님은 <출가>라는 시에서 ‘출가는/ 먼 물소리 따라/ 물 찾아가는 길....... 출가는/저기 저기 저 설산 너머의/눈부신 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노래했다.
청화 스님은 문학에 대한 열정만 뜨거웠던 것이 아니었다. 암울했던 시대에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기형적인 정치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했으며, 저 낮은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의 삶에 가슴 아파하는 또 하나의 뜨거운 가슴을 지녔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말했던 유마거사처럼 청화 스님 또한 민중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먼 물소리 따라 물을 찾아 나선 출가의 길, 그 길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를 만난 것이다. 세인들의 고통에 대해 애써 외면하지 못하는 스님의 여린 가슴이 사회참여에 발을 내딛게 했을 것이다. 수행자의 사회참여에 대해 사시의 눈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 않느냐고 여쭈었다.
“스님들도 사회적 역할이 분명히 있어야 살아있는 불교가 됩니다. 불교가 사회와 더불어 숨 쉬는 생명체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자(隱者)적인 그런 수행자의 삶을 산다면 불교는 사회와 동떨어지고 결국은 소외당하게 됩니다. 지금도 ‘세속을 떠난 사람이, 출가한 사람이’ 하면서 자꾸 섬이 되려고 하는데 이것은 소승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대승이란 보살의 원력으로 세간을 위해 회향하는 것인데, 자꾸 수행자의 이름 속으로 숨으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어떤 것이 중생 제도인지’를 물었다. 굳이 답을 들으려고 던진 물음이 아니라는 듯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갔다.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지 않을 경우 고통 받는 사람들 역시 중생입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 인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어요. 카스트제도가 있는 한 인권이란 것이 있을 수 없지요. 인권이란 특수층에만 있는 것이지, 노예계급이나 천민들에겐 인권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그 당시 여성들은 가정에서 말할 자유, 행동의 자유도 박탈당한 채 남녀차별이라는 이중의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카스트제도의 폐지와 여성해방운동을 펼쳤어요. 카스트제도나 여성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행해졌던 시대에 부처님의 이러한 사회참여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어요. 여성차별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부처님은 먼저 ‘어머니의 은혜’부터 부각시켰고 차츰 그 범위를 넓혀나갔습니다. 부처님은 조용하게 설법을 통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았고, 사회를 변화시켜나갔어요. 부처님은 결코 자신의 공부에만 안주하지 않고 시대정신으로 살았던 분입니다.”
‘부처님이 세간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연민을 가지고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바람직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자 무던히 애쓴 흔적이 <아함경>에 그대로 다 드러나 있음’을 강조했다. 근본불교사상 위에 대승사상이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것이 바탕이 되지 않은 것에서 출발한다면 대승불교는 공허한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부처님의 육성이 오롯이 담겨있는 <아함경>은 현실생활에 유익한 내용들이 담겨있기에 청화 스님은 <아함경> <법구경> <숫타니파타> 등 초기경전을 인용하여 법문하기를 좋아한다. 부처님의 교법이야말로 우리들에게 감로수도 되고 캄캄한 밤길에 등불도 되고 갈 곳을 모르는 곳에서는 안내자도 되는 것이며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보배란다.
“좋은 법문이란 듣는 사람이 감동하고 법문을 통하여 삶에 대한 강한 지침도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달프고 피곤하고 힘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세인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추상적이고 불교사상적인 것만 이야기한다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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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빈곤, 풍요와 오염, 개발과 보존 등의 역설로 존재하는 환경문제는 21세기의 중대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요즈음 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4대강 개발에 대해 여쭈었다.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반대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면서 “자연은 자연그대로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 입장에 선 것이라 한다.
“4대강 사업이 운하인 것이 명백해요. 운하가 아니라면 보를 쌓을 필요가 없고 수심을 6미터로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강을 살리려면 강을 오염시키는 주변시설물을 철폐하고 오염 물질이 스며들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 더 급하지 않을까요. 운하를 만들면 주변에 위락시설을 설치할 것이고 그야말로 강을 망치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들은 4대강 개발은 ‘물그릇을 키우는 것’이라면서 크게 우려를 하고 있어요.”
스님은 고시조 한 편을 읊었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山)절로 수(水)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절로란 인위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배재한 것입니다.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에는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어 있어요. 개발이라는 포퓰리즘(populism)에 의해서 경제성장과 연결시킴으로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가 하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개발이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을 예로 든다면, 한국전쟁 직후의 삶과 지금의 삶과는 천지현격의 차이가 있어요. 한국전쟁 직후의 가난한 삶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지금의 삶을 비교했을 때, 많이 가진 만큼 행복지수가 높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낮아진 상태입니다. 물론 행복지수가 더 높아진 사람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경제제일을 목표로 삼아서, 5만불 시대가 온다고 가정하면 대한민국 국민 전부가 다 행복이 넘치는 얼굴이 될까요? 지금 선진국을 보면 그렇지 않잖아요.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욕구충족엔 만족이란 것이 없고 계속 갈증만 생겨나는 것인데,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목표로 삼고 있어요. 이젠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사람다운 삶,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가치를 크게 발현시키고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소유 그 자체가 목표가 되고, 욕망만 추구하는 사회가 되다보니 인심이 각박해지고 심신이 점점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스님은 물질에 바탕을 둔 행복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유리알과 같은 것이기에 위태롭고 믿을 것이 못된다고 했다. 물질의 소유에서 오는 행복, 승리와 지배에 의해서 얻는 행복, 사랑에 의한 행복, 명예와 권력에 의한 행복 등 제각기 추구하는 행복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부처님은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진리가 아닌 것은 사람을 배신하고 끝내는 변하고 덧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부귀처럼 왔다가는 것이 아니며 현실적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금강석처럼 단단한 행복을 주는 것이다.
“진리에 의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는 번뇌를 소멸해야 합니다. 번뇌는 무명의 산물인데, 번뇌가 소멸된 마음에는 반야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 다음은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들의 삶에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재앙과 파멸의 독이 되기도 하므로 욕심에는 수용과 자제가 필요합니다.”
‘향 하나 사르며 비로소 흉터 없는 나를 만난다는, 향 하나 사르며 나를 만나 번뇌가 없는 계단을 경건히 오른다’는 청화 스님에게 특별히 현대불교신문 독자들을 위한 법문 한 마디를 청했다.
물이 대나무 숲가를 흐르니 푸르고
바람이 꽃 속을 지나오니 향기롭구나.
수향죽변 유출녹 풍종화리 과래향
水向竹邊 流出綠 風從花裏 過來香
“물은 여기저기 아무데나 갈 수 있는데 그 물이 어쩌다 푸른 대나무숲가를 흐르니 대숲이 가지고 있는 푸른빛을 띠게 되었어요. 물은 대숲의 푸른빛을 동경하였기에 푸른빛을 띠게 된 것입니다. 이리저리 흔들고 지나가는 것이 바람인데 바람의 소망은 향기를 담는 것입니다. 그런데 향기는 꽃에서만 나는 것이니 바람이 향기를 담으려면 꽃 속을 지나와야 합니다. 말하자면 대숲과 꽃은 하나의 환경을 상징하는 것이며 누리고자 하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물 혹은 바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 사회는 푸른 대숲과 향기를 내뿜는 꽃밭이 많아야 합니다. 자신이 소망하는 대숲과 꽃밭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만들어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 앞에 벌어진 사회문제는 남의 문제도 아니요 남의 탓도 아님을 자각하라는 말씀이다. 내 한 마음이 보태어져 이 사회에 향기를 낼 수도 있고 밝은 푸른빛을 낼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청화 스님은 푸른 솔처럼 풋풋한 청년정신을 지녔는가 하면 맑고 명징하고 담박하다. ‘저마다 삶이 어떻다 해도, 목숨은 끝내 흰 꽃을 피우는 것’이라는 스님의 시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싶다.
#청화 스님은?
1962년 출가. 1977년 <불교신문>,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 청평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수석부의장,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역임. 지금은 정릉 청암사에 주석하고 있으며 참여연대 공동대표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산문집 <돌을 꽃이라 부른다면>, <향기를 따라가면 꽃을 만나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