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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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연암토굴 도현 스님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게 중의 멋”

마당에 내려앉은 햇살, 석란 한분, 휘파람새 울음소리, 달빛이 어린 뜰,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돌수각에 떨어지는 물소리, 연못의 하얀 연꽃 두어 송이, 시식돌 위에 내려앉는 산새들, 눈 내리는 소리, 찻물 끓이는 소리,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시간, 검은 밤하늘의 빛나는 별빛, 3평짜리 오두막집, 차곡차곡 쌓아둔 땔나무. 이러한 것들은 도현 스님이 좋아하고 귀히 여기는 것들이다.

지리산자락에 터를 잡고 있는 연암토굴에 들어서면 ‘작은 것들이 내뿜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한다. 작은 것들이 와락 가슴에 담기어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된다. 3평짜리 작은 집에 작은 연못, 손바닥만 한 수각, 그리고 검은 고무신 한 켤레가 놓인 작은 섬돌이 눈에 들어온다. 누워서 만세 부르기도 어려운 가로 다섯 자 세로 여섯 자짜리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작은 불단이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은 법당이자 스님의 거처이다. 연암토굴에 머문 세월이 16년째이니 등잔불 하나에도 스님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난다.

도현 스님은 한국불교의 전통적 수행법인 간화선과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모두 섭렵한 수행자다. 출가 후 수십 년간 ‘이뭣고’를 화두로 잡아 수행했다. 안거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산철에도 좌복 위에서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마음에 ‘부처님도 이 뭣고를 염(念)했었을까?’라는 의문 하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처님은 어떤 수행을 하셨는지 궁금했다. 초기불교의 원형이 남아있는 남방불교국가중 하나인 태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가 1986년이었다.

넓은 숲속에 자리 잡은 사원에는 스님들의 거처인 작고 소박한 구띠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구띠란 원두막 같은 집으로 작은 방 하나에 샤워가 가능한 조그만 화장실이 딸려있으며 태국에서는 스님들에게 한 채씩 배정된다. 부처님 재세 시 숲속 수행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도현 스님은 태국에서 다섯 해 동안 위빠사나 수행공부를 했다. 그때 머물렀던 구띠를 뼘으로 재어 와서 그대로 지은 것이 연암토굴이다.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궁금증이 더해간다. 먼저 큰 집에 사는 것을 욕심내어 본 적은 없었는지 여쭈었다. 그러자 스님은 “이 집이 작게 느껴집니까?”하고 되물었다. 스님은 3평짜리 오두막이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큰집을 동경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없이 앉아서도 남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향적여래를 모시고 산다는 스님은 ‘자연을 의인화한 것이 바로 향적여래’라고 생각한다. 부처님께서 수행자 시절에 이보다 더 좁은 동굴에서 더 열악한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인도여행을 하면서 확인했기에 오히려 넉넉하게 느껴진단다.

“어떻게 하면 집을 작게 짓느냐를 고민했지요. 전 이렇게 조용하고 조촐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어요. 꿈을 가지고 있으면 꿈에 상반되는 장애물이 생겨나요. 하지만 꿈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좋은 조건을 버려야만 내 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은사스님은 병석에서 유언처럼 열 명의 상좌 중 맏상좌인 도현 스님에게 주지직을 맡기고 싶어 했다. 도현 스님은 절대로 주지직을 맡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은사스님이 서운해 했지만,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큰 집에 살 인연이 생겨나도 조촐하고 조용하게 사는 꿈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세상의 뜻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수행자’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 스쳐지나갔다.

스님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되지 않는 삶,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느끼면서 아직 한 가지도 놓아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무위의 삶에 대해 “장미는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한다. 장미는 피어있기 때문에 피어있는 것이다. 장미는 자기 자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장미는 누가 자기를 보는지를 묻지 않는다”라고 어느 현자가 노래했듯이 도현 스님 또한 그러한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스님의 출가동기가 궁금하여 여쭈었더니 “큰 뜻이 있어 출가한 것이 아니고 배고픔을 면하려고 출가했다”면서 웃었다. 부산 청학동에서 꽤 큰 부자로 살았었는데 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전답과 집이 모두 은행으로 넘어가버렸다.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했겠나 싶다. 한창 먹을 열여섯 나이에 사흘을 내리 굶어보기도 했단다. 그때는 하루 한 끼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던 인연이 있기도 했지만, 절에 가면 굶지 않는다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 나선 길이었다. 그때는 절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밥을 굶는 일은 없었다. 스님은 “출가할 때 하루 밥 세끼 먹는 것이 소원이었으니 그 외의 것은 전부 덤”이라고 한다.


위빠사나와 간화선 지향점은 같다
마음씀을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


도현 스님은 지금도 안거 때에는 큰 절 선방에서 대중들과 함께 좌복 위에 앉는다. 안거가 끝나면 다시 연암토굴로 돌아온다.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살아 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이십오 년은 간화선을 했고, 이십 년 넘게 위빠사나를 하고 있다. 간화선이 주중을 이루는 한국에서 위빠사나 수행자에 대한 홀대는 없는지 여쭈었다.
“위빠사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30년이 넘었고, 세월이 흐른 만큼 위빠사나 수행자도 많아졌어요. 한국불교는 통불교를 지향하기 때문에 어떤 수행법도 다 수용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위대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방법만 다를 뿐이지, 성불하자는 궁극은 같아요. 수행방법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고 마음씀씀이를 어떻게 쓰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띠는 알아차림 늘 깨어있는 마음인데, 사띠만 있으면 일상생활 자체가 위빠사나이다. 간화선이 화두로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사띠로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한 편의 예술행위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행위는 연출에 해당한다. 사띠는 연출하는 나를 지켜보는 감독관인 것이다. 즉 여기저기에서 자기 마음을 편드는 심판관이 아니라 관찰자가 되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지나치게 해야 합니다. 한 번 떠오르는 상념들은 되돌려 보낼 수도 붙잡아 둘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상념들이 떠오르지 않도록 막을 수는 도저히 없어요.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켜 볼 뿐이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대해 ‘좋다 싫다, 즐겁다 괴롭다’라고 값을 매기지 마세요. 그냥 내 마음이 그렇게 작용하고 있구나 하고 지켜보는 것이 사띠이고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나를 객관화해서 보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일상에서 호흡을 가지고 잘 익혀놓으면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알아도 저절로 알아차리게 된다. 사띠만 된다면 지금 차 마시는 것도 일상생활 그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란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란 엄격하고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조금만 힘을 얻으면 현재의 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누릴 수 있단다. 스님은 참선 혹은 위빠사나를 두고 ‘조용히 노는 방법’이라고 하며 이러한 수행은 ‘스스로 만드는 행복’이라고 한다. 아무리 바빠도 숨 쉴 시간은 있으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지켜보란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권의 저서가 출간된 ‘아잔 차’스님을 친견하였는지 여쭈었다.
그 당시 아잔 차 스님은 몸이 안좋아서 쓰러졌는데 식물인간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태국의 불자들은 아주 존경하는 마음으로 스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길게 줄을 서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큰스님이 병으로 누우면 ‘도인이 왜 저러는가’하는 시선으로 보는데, 태국인들은 ‘정신이 또렷할 때 어떤 일로 세상에 기여했는가’로 평가하기 때문에 아잔차 스님이 식물인간처럼 되었어도 여전히 불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고 한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도인이라 하더라도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은 아프고 늙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잔 차 스님은 ‘깨달음을 빨리 달성하도록 하는 특별한 방법보다는 일상에서 정기적으로 좌선을 하기를 그리고 좌선을 할 때는 마음이 고요해지 때까지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고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게 했단다.
도현 스님은 “인생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며 소유의 삶이 아니라 순간순간 존재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장애들을 생각하지 말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것 없이 현재에 머물러 살면 되지요. 우리가 사는 것은 언제나 바로 이 순간이며 순간을 통해서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 순간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였다.

“불가에서는 부처와 보살은 원력(願力)으로 태어나고 중생은 업력(業力)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원력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의지대로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업력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의지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원력이 굳건하고 선행을 부지런히 닦는 사람은 금생에 자기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개선해나갈 수 있어요.”
그러니 현재의 처지에 대해 전생을 탓하지도 말고 다음 생에 하겠다면서 미루지도 말고 사람 몸 받았을 때 현생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선재회로 양로원 고아원 돌며 무료봉사
소박한데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도현 스님이 애착을 가지는 ‘선재회’ 회원들과 인연을 맺어온 지도 이십 년이 넘는다. 가난한 양로원과 고아원을 돌면서 무료봉사를 하는 것에서 출발한 선재회는 지금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연암토굴이 있는 의신골에 ‘선재난야’를 마련한 선재회원들은 일 년에 서너 차례 도현스님의 지도 아래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간다. 도현 스님은 새벽예불 때 <자비경>을 독송하면서 이 세상이 좀더 따뜻해지기를 사람들이 좀더 행복해지기를 발원한다.

스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여 여쭈었다. 대중살이와 달리 독살이는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그동안 대중처소에서 익힌 습이 있어 새벽 4시면 일어나 다기 물 올리고 참선에 들어간단다. 그리고 한가한 시간엔 독서도 하고, 음악도 듣고, 날씨가 좋은 날은 다구를 챙겨 계곡에서 혼자 차를 다려 마시기도 하고, 몸이 무거우면 낙엽을 밝으며 산길을 걷기도 하고, 밤이면 누더기를 걸치고 하늘의 별들을 본다는 스님의 일상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버너 위에 올려놓은 누룽지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고소한 냄새를 맡다보면 자신의 삶이 고맙게만 느껴진다는 도현 스님은 “욕심이 없을수록 살아지는 게 중의 살림살이요,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게 중의 공부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게 중의 멋”이라면서 환하게 웃는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 속에는 ‘생은 덧없으니 부지런히 살펴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어요. 행복한 순간들을 잘 수용하면서 욕심 부리지 않고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 여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크고 화려한 것을 쫓아가는 세상과는 반대로 작고 소박한 것에 가치를 두고 그 아름다움을 귀히 여기는 스님의 향기는 지리산을 채우고도 남는다.

도현 스님 약력
범어사에서 덕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 출가 후 송광사, 쌍계사, 범어사, 태안사 등 전국의 선방을 돌면서 수행. 한때 쌍계사 금당선원의 선덕을 지냈다. 5년간 태국에서 위빠사나 수행공부를 했다. 지금은 16년째 지리산 연암토굴에서 홀로 수행정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용한 행복>이 있다.
글ㆍ사진=문윤정 본지객원기자 | blueyun6@hanafos.com
2011-02-28 오후 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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