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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출가 및 재가 선원에서 일제히 겨울 집중수행에 들어간 11월 20일(음 10월 15일) 동안거 결제일. 불심수도 부산에서는 시내 곳곳에서 회색빛 법복을 입은 재가불자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금정구 장전1동에 소재한 재가 수행도량 금정선원(원장 대명화)에서도 구순에 가까운 어르신에서부터 20대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결제법회에 동참한 수행자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이윽고 오전 11시 3층 법당. 금정선원의 스승이자 범어사 원로인 대정(大定) 큰스님이 결제법문을 하기 위해 법단에 오른다.
“꽝! 꽝! 꽝!”
주장자로 세 번 법상을 내리친 대정 큰스님이 사자후를 토하신다.
“법(法)에 따르면 부처요, 법에 어긋나면 범부입니다. 가고 오고 앉고 눕고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배설하는 움직임을 떠나 법이 따로 없습니다. 맑고 신선한 공기가 생명체와 둘이 아니듯, 사람이 법을 몰라도 법은 사람과 친밀하게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법이 있기에 생활과 소원 성취도 가능하고 이런 법문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법(眞法)은 말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올리자 가섭이 미소 지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달마 대사는 ‘모르겠다(不識)’고 했고, 육조 스님은 ‘이뭣고?’라 했으며, 임제 스님은 ‘할’을 했고, 덕산 스님은 방망이로 때렸으며, 조주 스님은 ‘무(無)’라 한 그것이 바로 진법입니다. 이러한 화두를 통해 무수한 도인이 출현하고, 영가들이 악도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며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것도 법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는 참회, 지혜를 키우는 독경, 지극한 정성을 발하는 기도, 생각을 깨끗이 해서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염불, 우리 본래면목을 깨닫게 하는 참선, 이 모든 것이 법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법은 절대 평등하고 공정해서 일체 사(私)가 없습니다. 법은 하나여서 한마음, 한생각, 한뜻으로만 통할 수 있습니다. 염불, 참선, 주력, 독경, 기도 그 무엇을 하든 일념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선원에서 지금 결제법회를 열지만, 결제와 해제가 따로 없이 365일 오직 일심으로 정진하는 것이 참 결제입니다. 선원에서 입선과 방선이 따로 있는 것도 근기가 하열(下劣)해서 그러한 방편을 마련한 것입니다. 화두를 챙기며 참구하는 동안을 결제라 한다면, 화두가 타파되면 해제인 것입니다. 화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해 정진하기 위해 토굴수행도 필요한 것입니다. 화두가 일념으로 들리게 되면 힘을 쓰지 않아도 화두가 알아서 진행이 됩니다. 화두란 불ㆍ조사께서 중생이 몰록 깨치고 증득하도록 내어놓은 최고의 진리이자 정법안장(正法眼藏)입니다. 현재 조계종에서 일본학계의 명칭을 받아들여 ‘간화선(看話禪)’이라 부르는 데, 그것은 옳지 않고 ‘조사선(祖師禪)’이라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화두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목적입니다. 견성성불 이외는 모두 허깨비입니다. 보고 듣고 움직이고 밥 먹는 게 모두 성품인데, 이 성품을 모르니 우리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합니다. 중생의 근본 무명업식으로 인해 반야지(般若智) 즉, 마음을 갖고도 마음을 모르고, 성품을 움직이면서도 볼 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영원불멸한 참모습을 알기 위해 의심해 나가는 탐구심이 곧 화두입니다. 화두는 흐트러진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정신통일의 능력과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모든 과학과 철학, 문화ㆍ예술의 발전이 탐구심 없이는 불가능 하듯이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있어야 깨달음이 가능합니다.
내 참모습을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알고자 지극정성으로 의심을 더욱 간절히, 열심히 계속 하다 보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생활 전체가 화두가 되고 선(禪)이 됩니다. 화두가 익어 번뇌와 망상이 자연히 소멸되면 구름이 걷혀 청천백일이 드러나듯이 의심덩어리인 화두가 타파되어 선지(禪旨)를 얻고 대도를 성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앉거나 눕거나 자도 아무 구애를 받지 않고 여여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을 깨닫기 위해서는 화두 이외는 잘 안됩니다. 도를 가장 쉽고 빠르게 통하는 방법이 화두 공부인 것입니다.
마음은 절대평등하고 자재무애합니다. 마음은 원래 청정하므로 물들지 않고 모든 것에 거리낌과 장애를 받지 않기에 마음 그대로가 해탈입니다.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으로 창조적 능력이 갖추어져 있기에 전지전능하고 불가사의한 신통력입니다. 마음은 명경(明鏡) 즉, 밝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의 맑고 고요함은 법신(法身)에 해당하고, 모습을 비추어 나타나게 하는 것은 화신(化身)이며, 절대평등하여 똥과 황금 등 일체에 차별 없이 비추는 것은 보신(報身)에 해당합니다. 전지전능하며 신통 불가사의한 삼명육통(三明六通: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력)의 힘이 나올 수 있는 것도 법(法)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육근은 한계가 있지만, 참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다 보고 듣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본래 목적은 신통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마음을 깨달아 견성성불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도록 자리이타의 보살도를 행하는 자비심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자비심을 갖고 양심을 어기지 않고 본심을 잘 지키면 진심은 저절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계행을 지켜야 선정이 이뤄지고, 선정을 닦아야 지혜가 나오는 이치인 것입니다. 화두는 계정혜 자체여서, 화두가 살아있으면 탐진치 삼독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삼독에 물들지 않으면 부처요, 삼독에 물들면 중생입니다. 화두의심이 살아있으면 부처요, 화두가 사라지면 중생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은 손바닥 앞뒤와 같습니다. 그래서 깨침은 손바닥 뒤집기 처럼 쉽다는 말도 나온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불ㆍ조사이자 삼신불이건만, 그것을 몰라서 불행한 삶을 삽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간단명료하건만, 스스로 어렵게 만듭니다. 마음은 마음 안에서 구해야 하고, 밖에서 구하면 병폐가 생깁니다. 알기 힘든 법을 어렵게 만났고, 법중의 법인 화두를 만났으니 최선을 다해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하나의 진실된 법의 세계를 설하고 있습니다. 참된 진실을 담은 소식을 접했으니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을 알면 허깨비 같은 이 삶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억(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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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차게 할을 하며 법문을 마친 대정 큰스님을, 법회가 끝난 후 6층 접견실에서 뵙고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달마 대사는 깨달은 분인데, 소림굴에서 9년 면벽을 하신 것은 보임(保任: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가는 悟後 공부)수행이라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2조 혜가 대사를 만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마치 강태공(姜太公)이 80년 동안 위수(渭水)에서 곧은 낚시를 드리운 채 성군(聖君)인 주나라 문왕(文王)을 기다린 것처럼 말입니다.”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해도 오랜 습기는 단박에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청정여래선인 조사선에서 화두를 타파하는 것은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 깨달아 단박 닦음)에 해당하지만, 습기는 단박에 소멸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소멸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부처가 될 때까지 보임을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업을 피해갈 수 없었듯이, 업은 소멸될 때가 되어야 소멸되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여 본심을 지키면서 보임공부를 하면 다생의 습기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돈오 이후의 돈수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수행이 아닌, 무위법(無爲法: 닦는 바 없이 닦는 무념ㆍ무심의 無修之修)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에서는 55위의 차제(次第)가 있지만, 돈오돈수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공부가 됩니다.”
-큰스님께서는 세 번 공부의 큰 경계를 맞으셨다고 들었습니다.
“17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선사를 친견하고 ‘이 뭣고?’ 화두를 받은 후 모악산에 들어가 6년간 토굴수행을 한 후 23세에 처음 선지(禪旨)를 얻었습니다. 이 때는 화두가 잠이 깊이 들어도 역력하게 이어져, 시간이 오래 흘러도 몸이나 생각은 간 데 없고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화두 뿐이었습니다. 29세에 동산 큰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후, 31세 때는 지리산에서 토굴수행을 할 때 도안(道眼)이 열려 한번 더 게송을 읊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지리산을 나와 범어사 선원에서 37세 때 게송 하나를 더 지었습니다. ‘도(道)는 어느 곳에 있는고? 보고 듣는 것이 그대로가 도더라. 알고 보니 도는 그대로 되어 있더라. 어느 곳에 다시 도를 구할 것인가? 숨음과 나타남이 때가 같아 이것이 바로 묘한 깨침이라. 누가 나에게 도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한 번 웃음으로 그 답을 대신하겠노라.’
-말법시대에는 도인이 적고, 도인이 나와도 알아보기 힘든 것입니까?
“대도는 바다 처럼 깊어 말이 없고 흔적이 없으며 우주법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말법시대에는 상근대지(上根大智)가 나오기도 어렵고 도가 드러나기 힘든 것입니다. 중근기는 상근기를 알아볼 수 없으며, 소인은 대인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근기가 중근기가 되고, 중근기가 상근기가 되어 단박에 언하대오(言下大悟) 하려면 다생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 부처가 출현하면 하나의 세계가 건립되는 도리가 있습니다.”
사자굴에서는 사자새끼만 산다더니, 금정선원이 재가도량이면서도 출가도량 못지 않은 범상한 기운이 서려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참선과 봉사행을 통해 용맹정진하는 대명화 원장을 비롯한 금정선원 도반들이 깊은 신심과 원력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닦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대정 큰스님의 무애자재한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듣고 마음밭을 아름답게 가꾸는 꿋꿋한 수행자들의 모습에서 불교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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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찬란한 불심수도의 법등(法燈)을 기억하며 상경하는 부산시내의 불야성(不夜城)이 한 폭의 불국토를 그려놓은 것만 같다. 있는 그대로가 정토이니, 길만 나서면 서울 가는 길이다. 고속도로가 막혀도 마음은 어느새 서울이다.
대정(大定) 스님은
1931년 대구에서 태어나, 46년 경북중 재학시절 대구 폭동사건을 피해 지리산 쌍계사로 입산했다. 49년 전북 봉서사에서 보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스님은 50~59년 모악산 토굴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 했으며, 59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60~67년 지리산 토굴에서 생식과 벽곡을 하며 용맹정진 했으며, 67~70년 범어사, 해인사, 마곡사, 선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70~79년 지리산에서 일종식으로 토굴 수행을 했으며, 79년부터는 범어사 휴휴정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