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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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원경 스님(만기사 주지)
길을 열어두면 반드시 걸어갈 사람이 온다

들판이 비었다. 창해(蒼海)같던 여름도, 금란가사(金?袈裟)를 펼쳐 둔 것 같던 가을도 지나가 버리고 들판은 비었다. 빈들이 베풀어주는 황량감이 제행무상을 설법 하는 것이라면, 그 설법에서 얻어들을 진리 하나는 가슴에 채워야 할 터. 만추의 들길을 지나가며 객기(客氣)로 내뱉는 독백이 그 진리는 아니겠지만.
“그려, 들판이 비었으니 누군가의 곳간은 찼겠지….”
그렇게 심심풀이 망상을 즐기는 동안 어느새 차는 무봉산(舞鳳山)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한 20년 됐나? 그때 우연히 들렀던 만기사(萬奇寺)는 참으로 소박한 절이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567호)의 맵시가 하도 단아하여 자꾸만 쳐다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야트막한 산일지라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이제 겨울에게 자리를 비켜 주고 있다. 나뭇잎 바삭거리는 소리에 부처님 귀가 간지러울 것 같다.

“와, 이럴 수가….”
큰길에서 절 쪽으로 접어들자마자 웅장한 도량이 떡 버티고 섰다. 기억속의 만기사는 소담한 옛 절집일 뿐이었는데. 그 사이 얼마나 큰 원력으로 불사를 진행했는지 한 눈에 알 것 같았다. 누각형식으로 지어진 명부전 아래를 통해 안마당에 들어섰을 때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오른쪽 구석에서 선홍빛 단풍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은 기운을 뿜어내고, 돌계단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대웅전은 세간에서 짊어지고 온 죄의 보따리와 함께 털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했다.
도둑질하러 온 사람처럼 조용히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가 석가여래께 삼배를 올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휴~ 이것도 제행무상이려니….
법당에서 나오니 절집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앞마당 채소밭 가에서 엔진톱 소리가 들렸다. 두툼한 잠바를 입은 처사님들이 겨울땔감을 준비하는지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가도 모른 채 일만하는 처사님들. 아니, 그 뒤편에 스님 한 분이 쭈그리고 앉아서 전기톱을 움직이며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원경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스님 어디 계시는지요?”
“……”
“주지 스님을 뵈러 왔다니까요?”
엔진소리 때문에 질문이 안 들리는 듯해서 큰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말이 없던 스님이 천천히 일어섰다. 오래 앉아 있었던지 바지에 수북 묻은 톱밥을 털면서 “현대불교에서 오셨나? 에이그, 오지 말라고 했는데…” 하시는 게 아닌가? “아이고, 스님이시군요? 못 알아 뵈어 죄송합니다.” 몸 둘 바를 모른 채 인사를 드려도 먼 산만 바라보면서 “얼굴 봤으니 이제 돌아가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할 뿐이었다.



‘박헌영의 아들’ 불편한 주목 받을수록 수행에 매진
뒷사람 공부하는 도량 만들고자 만기사 사격 ‘일신’


원경(圓鏡ㆍ70) 스님. 인천 용화사 조실 송담(松潭)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지 50년이 된 원경 스님은 여주 신륵사 등 큰 절 주지도 역임했지만,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 주목 받았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그런 주목은 매우 불편한 것이었고 불편한 만큼 자신을 더 철저한 수행자로 단련시키게 했다.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으며 당대 최고의 공산주의 사상가였던 박헌영. 남로당을 창당했지만 남한에서 정착하지 못했고 북으로 올라가 조선노동당부위원장으로서 김일성과 어깨를 견주었지만 창창(蒼蒼)하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던 인물.
아직도 역사 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측면이 다분한 선친(先親)에 대한 원경 스님의 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그 하나의 이유가 남모를 눈물과 남다른 비장함으로 세상을 견디도록 했을 뿐. 그래서 가급적이면 혈연에 대한 질문은 드리지 않을 참이었다. ‘돌아가라’던 스님이 다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흰 강아지와 함께 졸졸 따라가니 “추운데 들어가라”며 무봉선원 맨 끝 방의 미닫이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스님은 장작을 한 소쿠리 가지고 들어와 방구석에 있는 나무난로에 불을 붙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난로지만 보일러 기능이 있어 선원 건물 전체를 덥혀준다고 했다.

천천히 걸어와 천천히 방문을 열어주고, 천천히 장작을 안고와 천천히 난로를 피우고, 천천히 다관을 씻어 와 천천히 차를 우려내고, 다시 천천히 찻잔을 내밀고는 천천히 말씀을 시작했다.
“나무가 아깝잖아. 요즘은 산마다 간벌한 것도 많고 불사하고 나온 폐목도 많으니 이렇게 나무를 때서 열을 얻는 거지. 물론 사람 사서 나무하고 어쩌고 하면 차라리 기름보일러가 타산이 맞지만, 절에서야 이렇게 나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폐목재 버리는데도 다 돈이 들거든.”
물론 경제적인 타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쪽에서는 나무가 썩어가고 한 쪽에선 비싼 기름을 태우는 부조리를 절집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일 게다. 먼저 불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터를 넓히고 다지기 위해 쏟아 부은 흙이 25톤 트럭으로 8000대나 된다고 했다.
“그래도 그게 다 한 가지 일입니다. 불보살님의 은혜 갚는 일이지 다른 게 아니잖아요. 조금씩 뜻이 모아지고 힘이 닿는 대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 일주문 세우고 천왕문에 사천왕을 모시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일이란 게 시작을 하면 자꾸 커지게 마련이라서 망설이게 되고 인연이 더 익도록 기다리고 그러는 겁니다.”

은사인 송담 조실께서는 언제나 “참선 외에는 중생고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원경 스님은 “도량하나를 반듯하게 일궈 놓는 것도 내 몫에 벅찬 일이어서 계획한 불사는 다 마치고 싶다”고 말했다. 스님은 달마대사의 ‘무공덕’ 화두를 설명하며 “그래도 길을 열고 안내하는 일은 누가해도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절을 지어 놓고 선원을 만들어 두면 언젠가 어떤 인연으로든 이곳에 찾아와 정진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산속의 짐승들에게도 그들의 길이 있고 사람에게도 사람의 길이 있듯이 누군가 길을 열어 두면 반드시 그 길을 밟는 인연이 있을 것이기에 오늘의 만기사는 내일의 도량이 되는 겁니다.”
원경 스님은 잘 지어진 선원 건물의 지하방에서 기거한다.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 굳이 지하방을 고수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눈 푸른 운수들이 찾아와 성성하게 화두를 밝히고 정진할 도량을 지은 것이지 내가 편히 지낼 요사를 지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천천히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두툼한 시집 한 권. <못다 부른 노래>라는 제목의 이 시집은 지난여름 선친의 서거 55주기 기일(7월 19일)에 맞춰 출간한 원경 스님의 시집이다. 수행의 행간에 낙서를 하듯 써 두었던 글들을 모으니 500편 가까이 됐고 그 가운데 추리고 추려서 240여 편을 한 권에 묶었다. 스님이 스스로 자처한 일은 아니고, 황석영, 김지하, 이동순, 임헌영을 비롯한 문화계의 중진 원로들이 간행위원회를 꾸려서 뒷받침을 해 주어 성사된 불사다.


원경 스님은 이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나의 이야기’란 제목으로 성장기를 밝혔다. 등성듬성 소개하면 이렇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며 혁명가인 이정(而丁) 박헌영이었으며 어머니는 정순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물려받고 태어난 나의 고달픈 운명은 미리 예견돼 있었다. 나는 백일이 안 되어 젖도 못 뗀 채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하는 비운아가 된 것이다. <중략>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와의 만남은 6번 정도로 기억된다. <중략> 한산 스님 손에 이끌려 열 살에 화엄사 주지 서동월 스님에게 가 머리를 깎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절과 처음 만나 청소를 하며 스님들 고무신도 닦아 주며 염불을 외우면서 살게 되었다. 또다시 한산 스님을 따라 연곡사로 가 잠시 머물다 피아골을 거쳐 지리산으로 올라가니 서울에서 아버지한테 놀러 갔을 때 보았던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현상 선생이었다. <중략> 1953년까지 지리산에서 산사람들과 눈, 비, 바람을 이불삼아 무술과 행공을 연마하면서 모진 훈련 속에 나는 3년을 지냈는데, 이현상 선생이 ‘저 아이는 살리라’고 한산 스님에게 부탁하여 스님은 나를 데리고 국군토벌대의 눈을 피해 지리산에서 하산하게 되었다. 한산 스님은 금릉 청암사로 나를 데리고 가서 4년간 강고봉 강백에게 사교까지 배우게 했다. 나는 새벽과 밤중엔 무술과 행공을 연마하면서 격동의 험한 시대를 살아오게 됐으며 그동안 사용한 이름만도 병삼, 유동, 세원, 현준, 일우, 명초, 성진, 혁, 원경 등을 더하여 14개의 이름을 쓰면서 살아오게 되었다. <중략> 한산 스님은 송담 큰스님만이 너의 한 많은 생을 승화시켜 제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60년도에 송담 스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남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견뎌야 했던 아픔들이 담담하게 기록된 ‘나의 이야기’. 어쩌면 이 이야기는 원경 스님의 이야기이면서 아직 가족을 남과 북에 두고 가슴을 치며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못 다 부른 노래>다.
“인생이란 게 누구나 그렇게, 못다 부르고 가는 노래 아니겠어요?”
간단한 말씀이지만 결코 간단하게 들리지 않았다. 스님의 삶을 이끌어준 한산 스님은 “저항적인 언구가 많으니 앞으로는 글 쓰는 것을 삼가라”며 스님이 시 쓰는 일을 못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뭔가 낙서하듯 메모하는 것을 좋아했고 백석의 시집을 품고 읽었던 스님이고 보면, 그렇게 말린다고 그만둘 일이 아니었다. 출가 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살 수 없는 여러 환경이 스스로 생각을 메모하고 한편한편 시로 정리해 나가도록 했을 것이다.
어디서 문학 이론을 배운 것도 아니고 어떤 제도를 통해 등단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주머니 속의 송곳이 삐쳐 나오듯 돋아나는 생각의 자투리들을 모으고 정제한 것이 스님의 수행이었던 것이다.
“수행의 과정에 건져 올린 생각들이니 이 시들이 곧 스님에게는 오도송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원경 스님은 크게 손사래를 치며 ‘그저 낙서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보면 원경 스님의 시들은 ‘시(詩)’라는 한자어를 파자한 그대로다. 언어(言)의 도량(寺)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깨침의 편린들 말이다. 그래서 김지하 시인은 스님의 시집에 새로운 장르의 명칭을 붙여 주었다.
“선재남류(善財南流) 직전 동자소(童子所)에서 문수사리가 동자, 동녀, 우바이, 우바새 오천에게 나누어준 화엄시집(華嚴詩集)”
‘화엄시집’에서 시 한 편, ‘백일홍’을 함께 읽어보자.

남 먼저 살짝 핀 진달래꽃처럼
백일홍은 큰 인상이 없다 하리라
꽃 중의 꽃 목단 꽃처럼
백일홍은 화려하지 않고
너무 수수하다 하리라
그러나 봄에 피어 붉디붉고
긴 여름 한 철 붉디붉고
늦가을 찬 서리 바람
마지막 순간까지 붉디붉은 백일홍
너는 언제나 꽃이더라
나는 빌었네 꽃이라면
우리들 모두 백일홍이기를


원경 스님은?
1941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이정 박헌영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어린 몸으로 견뎌야 했다. 10대 초반에 지리산에서 빨치산들과도 지냈고 화엄사 청암사 등에서 행자생활을 하며 경전을 익혔다. 1960년 송담 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하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이 수행자로서의 본분에만 몰두했다. 여주 신륵사 흥왕사(서래암) 등 주지를 역임했으며 1995년 이후 평택 만기사에서 중창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글 사진=임연태(시인 본지논설위원) | mian1@hanmail.net
2011-02-14 오후 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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