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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색은 유순해지고 들녘은 가을걷이를 기다리고 있다. 지리산 자락 칠선계곡에 자리 잡은 서암정사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서암정사 종각에 서면 겹겹이 둘러쳐진 산자락 사이로 지리산의 최상봉인 천왕봉이 보인다. 천혜의 절경에 자리하고 있는 서암정사는 한국의 굴법당에 대한 기록을 새로 쓰게 했다.
서암정사에 들어서서 자연암반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눈맞춤을 하는 순간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게 된다. 사천왕상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면 아치형으로 된 대방광문(大方廣門)을 지나게 된다. 대방광문은 화엄세계 즉 비로자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말한다. 대방광문을 지나면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만나게 된다. 커다란 한 개의 바위에는 비로자나불과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새겨져 있으며 2단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반존자를 새긴 바위는 독성각이 되고,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을 새긴 바위는 산신각이 된다. 도량을 둘러보면 태초에 이 땅은 만년성지로 점지되어 있다가 기연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천연동굴인 굴법당에 들어서면 불보살의 세계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법당문을 열고 들어서면 순간이동을 하여 천상계에 발을 딛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든다. 불보살 사이사이의 여백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구름과 물결을 따라 어디론가 둥실둥실 떠가는 느낌이다. 아미타불전에 나붓이 삼배를 올리고 굴법당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다. 오래전부터 뵙고 싶었던 부처님의 10대 제자들, 48대원을 세웠던 법장비구도 법당을 지키고 있다. 자연동굴에 불과했던 공간이 원응 스님의 수행과 높은 안목에 의해 화엄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완성되어졌다.
낡은 검은색 털신을 신은 원응 스님이 주장자를 짚고 도량을 거닐고 있었다. 눈꼬리가 부처님 같이 인자한 스님의 얼굴을 마주하자 세속에서 힘겨웠던 마음들을 내려놓고 싶어졌다. 스님의 근황을 여쭈었더니 “노인네 하는 일이 별 것 있나.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이지”라고 하신다.
“예전보다 근력이 떨어져서 활동량이 아무래도 줄어들었지. 생로병사를 피할 장사가 어디 있겠노?”
굴법당 앞의 배롱나무는 끝물이라 색 바랜 꽃잎 몇 장을 달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사람으로 치자면 한 쪽 팔이 잘려나간 것처럼 생김새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이 배롱나무 나이가 200살도 넘어요. 어느 농가의 마구간 앞에서 천대받다가 나무 장사에게 팔렸어. 내 눈에 들어서 굴법당 앞에 심어놓았지.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자기 자리가 있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빨리 찾아가는 것도 공부야. 너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
원응 스님은 1960년에 선공부를 위해 조용한 지리산 벽송사에 들어왔다. 한국전쟁으로 벽송사는 폐허 직전이었고 법당의 부처님은 탈금이 되어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량을 일으켜 세우면서 벽송사가 조선인민유격대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심과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많은 원혼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이데올로기에는 민주주의가 있고 사회주의가 있지만, 부처님 법 안에서는 그런 분별은 없어지고 똑같이 불성을 지닌 사람들이지. 부처님 법 안에서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기에 아무 이유 없이 원통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들을 달래주고 싶었지.”
스님은 지금의 서암정사인 자연석굴을 발견하고 나서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스님은 이곳을 만년도량으로 일구어내야겠다는 발원을 했다. 일꾼들과 함께 손수 돌을 져 나르는 일을 했고, 도량의 큰 나무부터 풀 한포기까지 스님이 직접 심고 가꾸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연장을 잡았고 으스름 저녁녘이 되어서야 연장을 손에서 놓았다.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기쁜 마음으로 일한 그때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종일토록 무심의 도 안에서 노닐고
벌 나비 쥐와 함께 기쁘게 친구하네.
終日無心道樂裏
蜂蝶野鼠歡喜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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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석굴에 굴법당을 조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까풀막진 숲 속에 스님이 생각하는 화엄의 세계를 조성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다. 스님은 굴법당 조성하는 이 일을 금생에 다 해마치지 못하면 다음 생에라도 할 것이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다. 스님은 세월을 헤아리지 않고 눈앞에 하나하나씩 펼쳐지는 화엄의 세계만을 보았다.
“우리가 한 생만 살고 그만 사는 것이 아닌데 그리 서두를 일이 뭐 있나. 어떤 일을 할 때 조바심 낼 필요가 없어요. 공력을 들이면 들인 만큼 다 나오게 되어있어.”
스님은 결코 말씀을 길게 하시지 않는다. 평생을 말보다는 몸소 실천하고 행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혹 사람들 눈에는 원응 스님이 본분사를 잊어버리고 굴법당 짓는 일에만 매진한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님에게는 노동이 곧 수행이요 수행이 곧 노동이었다.
생각생각에 이뭣고를 놓지 않다
삼십년 세월을 잊었네
念念不離是甚?
不知歲月三十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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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응 스님은 1985년 서암정사를 건립하면서 <대방광불화엄경> 80권본을 금니로 사경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금니로 사경하기 전에 먹으로 <금강경>을 120번, <대방광불화엄경> 80권본을 사경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스님만의 독특한 서체가 탄생했다. 처음 10년은 먹으로 58만 7261자에 달하는 <화엄경> 전문을 사경하였는데, 이는 금니사경을 위한 준비과정이기도 하다. 오탈자의 방지를 위해 봉은사 판본과 직지사 판본을 일본신수대장경과 대만중국대장경과 대조하고 점검하여, 글자 한 자도 빠지거나 틀리지 않도록 바로잡았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다시 5년의 세월 동안 매일 300자씩 사경하였다. 손수 쪽물을 들여 만든 감지(紺紙)위에 금가루를 아교에 섞어 붓으로 써내려간 감지금니(紺紙金泥) <대방광불화엄경> 전문이 사경되어 1999년에 완성되었다. 15년의 세월동안 힘든 사경으로 인해 여러 차례 팔이 빠지고, 시력을 잃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부처님의 육년 고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참선과 기도로서 극복했다. 낮에는 가람 짓는 일을 하고 밤에는 불 밝혀 사경 수행을 하는 동안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원응 스님은 화엄경 사경을 하면서 여러 가지 신묘한 일이 있었지만 ‘마음을 깨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사경수행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사경원’이라는 공공기관을 두어 국가적으로 사경전문인을 배출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의 숭유억불을 거치면서 사경은 거의 맥을 잃고 말았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 사경본은 국보 제19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원응 스님의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 80권 전문 사경본은 세계 유일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6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써내려갔다고 하니 얼마나 집중하여 정성을 들여서 사경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 자라도 틀리면 그 페이지는 다시 써야 하는데, 글자를 틀리게 썼다고 해서 함부로 찢어버릴 수 없는 것이 경전이기에 한 자를 쓸 때마다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스님은 “사경할 때의 그 마음이 바로 화두 드는 그 경계와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 원응 스님은 사경통선(寫經通禪)이라 하여 “사경수행은 곧 선수행과 상통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사경은 선과 함께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최상의 수행법”이라 했다. 스님은 선방 좌복 위에서의 선만이 선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스님은 노동을 통한 선, 사경을 통한 선으로, 수행이란 앉는 태(態)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임을 보여준 것이다.
“사경을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참회기도와 함께 다른 이들의 행복과 우리 사회가 밝아지기를 발원하는 것이 더 귀하지. 자식을 위한 기도도 좋고 다 좋은 일이지만, 마음을 크게 쓰는 것이 부처님 법이지. 글 한 자에 절 한 번, 혹은 글 한 줄에 절 한 번을 할 만큼 경건한 마음자세로 사경을 하다보면 지혜의 눈이 열리는 것이지.”
경전을 몇 번 사경했다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경하는 동안 내 안의 탐욕과 번뇌를 단속하고 눅여나가는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이라 했다. 원응 스님은 사물의 외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꿰뚫어보시기에 중생들의 숫자놀음도 마뜩찮은 것이다. 사경을 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오자나 탈자가 생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사경수행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수행법이다. 사경삼매의 그 맛도 화두삼매와 다르지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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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응 스님의 상좌이자 서암정사의 주지인 법인 스님은 ‘사경통선’을 널리 알리고 싶어 서암정사에 ‘사경법보전’을 건립했다. 건평 80평으로 지어진 사경전문 전시관이자 참배관으로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 사경본을 중심으로 하여 금니, 은니, 경면주사 사경본과 탑 다라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경수행을 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공간과 프로그램도 마련해 두었다. “불교는 스스로가 체험하지 않으면 그 깊은 맛을 알 수 없어요. 사찰에서 직접 사경삼매를 느끼고 수행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기복으로만 흘러가는 신행생활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원응 스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길지 않은 한 생 동안에 굴법당인 서암정사와 금니 <대방광불화엄경> 사경본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고 했더니, “출가인은 오로지 공부한 것만을 가져가지 다른 것은 없다”는 말씀을 낙관처럼 찍는다.
원응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그 후 전국의 제방에서 참선공부에 매진. 1961년 지리산 벽송사에 들어가 도량을 중창하고 서암정사 창건. 1985년부터 15년에 걸쳐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화엄경 금니사경 전시회를 한국과 대만에서 여러 차례 열었다. 서암정사에 주석하며 ‘사경통선(寫經通禪)’을 널리 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