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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읍내로 들어서자 펼쳐지는 풍광이 다르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이어지는 찻길, 그리 높지 않고 야트막한 산 능선, 각지지 않고 구불구불한 논두렁은 눈을 평온하게 해준다. 야트막한 산이 품어 안고 기르는 것 또한 사납지 않고 연약하고 보드라울 것 같다. 직선을 따라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구불구불한 곡선은 급할 것 없다면서 ‘느림’을 일러준다.
보림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문을 연 중심사찰이다. 도의 선사의 법손인 보조체징(804~880)스님이 창건하였고 그때 조성한 철조 비로자나불상이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다. 일주문과 사천문 그리고 대적광전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서 있는 가람 배치가 낯설다. 가지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지만 대적광전, 대웅전, 미타전, 명부전, 종각 등 당우들이 툭 트여진 하나의 넓은 공간에 들어서 있다. 도량 곳곳에 단풍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후박나무 등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우뚝하니 서 있어 자칫 허전해 보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푸근하고도 살가운 곳으로 만들어준다.
지묵(智默) 스님은 푸른빛 연꽃이 그려진 하얀 다기에 찻물을 부으면서 ‘야생 녹차라 맛이 다를 것’이라 했다.
“녹차나무는 사람보다 예민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차맛을 잃지 않아요. 보림사는 차나무의 성정을 거슬리지 않고 야생으로 키우고 싶어 풀도 베지 않고 그대로 두는 등 최소한의 손질만 합니다.”
‘차나무 본위로 거루고 싶다’
이 한 마디에 스님의 살림과 수행 담겨 있어
글 쓸 때 옆에 ‘육법전서’ 놓고 써
‘차나무 본위로 거루고 싶다’는 이 한 마디에 스님의 살림살이와 수행의 깊이를 다 알아버린 듯하다. 지묵 스님은 <죽비 깎는 아침>을 비롯하여 <산승일기> <날마다 좋은 날> <초발심자경문 강설> <육조단경 강설> 등 스무 권도 훨씬 넘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출가자가 쓴 에세이집이 드물 때 법정 스님과 더불어 수행자의 삶과 절집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맛깔스럽게 대중들에게 들려주었다. 요즈음은 어떤 글을 쓰시는지 궁금하여 여쭈었더니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글 쓰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어두었다는 뜻밖의 말씀을 들었다.
“법정 스님께서 열반하시기 그 무렵에 밥을 받아먹을 만큼,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만큼 많이 아팠어요. 법정 스님 장례식도 못가고 49재 때 송광사에만 겨우 갔어요.”
그때는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 만큼 아팠기에 설핏 법정 스님이 ‘나를 데려 가실라나’ 그런 생각까지도 했더란다. 불교대학 강의실에 모셔진 아담한 불상을 가리키면서 “법정 스님이 보시하신 것인데, 퇴원하면 불상을 보러 오시겠다고 전화통화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평생 동안 실질적인 법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법의 스승이요 의지처였던 법정 스님의 열반은 아직도 애절하기만 하다.
이야기는 송광사에서 보낸 행자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사미계를 받기 전에 산중 어른스님들께 인사를 하러 다녔는데, 불일암에 올라가 법정 스님께도 예를 올렸다. 법정 스님은 지묵 스님의 불명을 두고 “평생 종이와 먹이 따라다니겠구먼”그랬다. 그 말씀에 “지묵필연(紙墨筆硯) 그런 뜻이 아닙니다”고 말씀드렸더니 “두고 보게. 평생 글 쓰고 그림도 그릴 것이네”하고 아주 장담을 하셨다. 1975년에 불일암이 단장되었고, 그때 돌층계와 돌담을 지묵 스님이 직접 쌓았다. 그 다음 해에 법정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어 불일암의 공양주를 자청했다. 일 년 동안 저녁이면 가사장삼 수하고 대혜 스님의 <서장>을 배웠다. 법정 스님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서장>을 공부한 이 일은 가장 아름답고도 귀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법정 스님은 “내가 지묵수좌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 있어. 수제비 끓이는 것하고, 돌담 쌓는 것 하고 각(刻)하는 것이야”하고 추켜 세워주시곤 했다. 그만큼 지묵 스님의 손끝이 맵고 야무져 무엇을 해도 당신 마음에 꼭 든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불일암의 돌담과 돌층계를 쌓은 지 스무 해가 넘었고 태풍이 지나간 횟수는 셀 수도 없건만 아직도 무탈한 것을 두고 법정 스님은 농(弄)처럼 ‘특수공법’으로 쌓아서 그렇다고 했다. 지묵 스님은 돌을 보면 인체를 보는 것처럼 눈과 머리, 몸통이 보인다고 하니 그 안목 자체가 특수공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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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에 있는 송광사 분원인 고려사로 포교를 위하여 떠나게 되었다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러자 법정 스님은 다락에 올라가시더니 신채호 선생의 <한국사> 상하권을 가져와서는 이것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면서 건네주시데요.”
행여나 미국에 가서 한국을 잊어버리고 한국역사를 잊어버릴 것을 우려하시어 당신의 손때 묻은 <한국사>를 건네주던 그 모습도 잊지 못할 일이란다. 법정 스님은 당신이 연재하고 있는 지면에 지묵 스님의 글을 싣도록 했고, 그렇게 하여 지묵 스님을 글쟁이로 데뷔시켜 주었다. 몇날 며칠을 두고 이야기하여도 법정 스님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와 추억은 쉬이 바닥이 날 것 같지 않다. 글 이야기가 나온 김에 ‘글을 잘 쓸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초등학교 때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하여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란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 여행 중에도 휴대용 벼루를 지니고 다니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을 합니다. 그때그때마다 생각이 떠오르면 수첩에 메모를 해두었다가 저녁엔 이걸 참고로 휴대용 벼루에 먹을 갈아 일기를 써요.”
스님은 무엇을 한 번 시작하면 중도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하게 되는데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웃었다. 프랑스 작가인 스탕달이 <적과 흑>을 쓸 때 ‘법전’을 옆에 두고 썼듯이 지묵 스님 또한 수행자의 글에서 감성이 짙게 묻어나올 것을 염려하여 글을 쓸 때는 꼭 <육법전서>를 펴놓고 쓴다. 글 쓰는 것이 곧 수행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지묵 스님은 육년 남짓 인도, 프랑스, 일본, 중국 등지로 수행을 위한 만행을 하였다. 이렇게 만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법정 스님의 격려와 물질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단다. 만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수행했던 그 기록은 <나마스테> <봉주르 길상입니다> <달마와 혜능> 등 여러 권의 책으로 남아있다. 일 년 동안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여행을 하였고, 법정 스님의 요청으로 프랑스 길상사에서 소임을 보기도 했다. 일본의 조동종 사찰인 덕림선사(德林禪寺) 초청으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매섭게 정진을 했다. 만행 길에서 보고 듣는 것은 다 공부가 되고 수행이 될 터이지만, 일 년 동안 중국의 선종사찰을 순례한 것은 더욱 값진 공부였다. 일 년 동안의 선종사찰순례를 위하여 중국의 연대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등 준비도 단단히 했다.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역사가 단절되고 종교가 잠들어 있어서 현장답사에서 무엇을 얻는다기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선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스스로 일깨우는 그런 과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대혜 스님을 흠모하기에 그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다녔다. 아육왕사를 갔을 때는 지묵 스님의 허름한 차림새와 잡다한 참고자료로 30킬로그램은 족히 되는 바랑을 보고서 떠돌이승이라 생각하여 홀대를 하더란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화두선의 종장인 대혜 스님의 법향이 스며있는 곳이라 방장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멀리서 온 이방인이 <서장>에 대해 깊고도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란 아육왕사의 방장 스님은 가장 좋은 객사를 내어주더란다. 선풍기가 있는 방에서 당장 에어컨이 있는 방으로 옮겨주는가 하면 옛 풍습 그대로 목욕할 뜨거운 물을 물지게로 져 날라주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스님은 이 또한 대혜 스님의 음덕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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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선종사찰에는 여전히 선농(禪農)사상이 남아있어 스님들이 인분을 밭에 뿌리는 험한 일 부터 해서 농사일을 다해내더란다. 그리고 페인트칠하고 돌담을 쌓는 등 사찰을 직접 장엄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지묵 스님 또한 평택의 아란야선원 선원장일 때 ‘선농일치’를 실천하며 대중들과 더불어 농사지으면서 수행정진 했다.
일본의 선수행이 궁금하여 여쭈었더니 ‘일본 스님들이라 하여 전부 다 대처(帶妻)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승들은 독신생활을 한다’고 했다. 깨달음의 인가를 줄 때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사람에게만 인가증을 준다고 하니 일본의 선수행이 무너진 것은 결코 아니더란다. 이처럼 만행이란 사시(斜視)로 굳어진 안목을 바르게 펴주는 그런 공부이기도 하다. 일본의 덕림선사 국제선원에는 공양주가 따로 없고 결재한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공양을 준비하는데, 그것 또한 크게 배울 점이라 했다.
지묵 스님이 보림사 주지소임을 맡아서 여러 가지 일을 새롭게 도모하고 있다. 이곳에 머문 햇수가 삼년이 넘었건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요법회를 열고 있으며, 장흥불교대학 1기생 37명을 배출했고 지금은 장흥불교대학 2기생들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일요법회와 불교대학을 열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도심이 아닌 이곳 시골에서는 힘들 것이라면서 다들 말렸다. 지묵 스님은 어디에서건 대중들과 법의 향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일요법회를 시작했고, 법회 때마다 회보를 만드는 등 심혈을 기울인다. 불교대학에 쓸 교재도 스님이 직접 만든다. 부처님 일대기를 공부할 때는 부채에 ‘팔상록’을 그림화하고, 선사상을 공부할 때는 열 개의 부채에 ‘심우도’를 직접 그려서 시청각교육이 되게 한다. 지묵 스님은 지금도 다양한 그림교재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묵 스님께 삶의 지혜를 여쭈었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스님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산중에서 칩거하고 있는 대매 법상 스님을 만났다.
“스님, 산을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대매 법상 스님이 “수류거(隨流去)! 흐름에 따라가시오”라고 답했다.
“산을 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길을 잃었을 때에는 골짜기의 물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아랫마을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현상은 변화무쌍하여 폭포수 같은 순행(順行)도 있고 웅덩이 같은 역행(逆行)도 있기 마련입니다. 순행이 오면 오는 대로 역행이 오면 오는 대로 거스르지 말고 그 흐름을 타는 것입니다. 잘 나간다고 오만하지 말고 잘못 나가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여여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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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묵 스님은 왕새우가 그려진 부채를 건네시면서 “새우는 남몰래 숨어서 껍질을 벗고 왕새우로 성장해요. 불자들도 하루 중 시간을 내어 좌선, 염불, 금강경 사경, 보문품 독송, 108배 절하기, 다라니 진언 등 자기에게 맞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하루 중에도 자신의 길을 찾아 숨어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 말씀이 시처럼 아름답게 들린다.
지묵 스님 약력
1948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1976년 조계산 송광사에서 법흥 화상을 은사로 출가. 송광사 총무, 길상사 선원장, 법련사 한주를 지냈으며, 불교방송 신행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금은 장흥 보림사 주지이다.
저서로 <날마다 좋은 날> <비온 뒤에 무성한 조롱박 넝쿨> <산승일기> <노스님의 젊음> 등 여러 권의 수필집과 <초발심자경문강설> <육조단경 강설> <신심명> 등의 강의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