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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천연(丹霞天然)선사가 어느 날 낙동(洛東) 혜림사(慧林寺)에 이르렀다. 엄동설한이라 날씨가 매우 추웠고 방도 냉골이다. 법당에 들어가 불상을 보니 목불(木佛)이었다. 선사는 불상을 끌어내려 도끼로 쪼개서 불을 피웠다. 원주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며 꾸짖었다. “감히 불상을 태우다니! 당신 미쳤소?” 선사는 막대기로 탄 재를 뒤적였다. 원주가 기가 막혀 물었다. “뭐하시오?” 선사가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사리를 찾고 있네.” “아니 목불에서 어찌 사리가 나온단 말이요?” “사리가 안 나오면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인데 어찌 부처님이라 할 수 있겠소?" “….”
옛 선사들의 무애자재 한 행각을 얘기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의 일화다. 선의 입장, 깨달은 이의 안목에서 목불은 정말 나무토막일 뿐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일화로 인해 선을 잘못 알게 되고 불교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된다. 진리를 설파하는 옛 선사의 격렬한 몸짓이 공부가 얕은 중생심을 들뜨게 할뿐 진정한 가르침으로 전해지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투철한 정진은 해 보지도 않고 말로만 깨침을 얘기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에게도 불상(佛像)은 불상이지 나무토막일 수 없다. 사리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나무토막에 불과하다고 말한 단하천연 선사의 낙처(落處)는 불상의 진위에 있지 않다. 분별심에 사로잡힌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가풍 속에서 목불 하나 태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불이 아니고 마음이다.
예로부터 존귀하게 모셔온 불상은 수없이 많다. 오늘날에도 끝없이 조성되고 있으며, 법당에 여법하게 모셔져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누가 목불상을 나무토막이라 하고 철불상을 쇳조각이라 말하겠는가? 이미 그 형상에 사람의 정성이 깃들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스며들어갔으니 형상은 형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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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장’은 정신 전하는 타임캡슐
불상에 사람의 정성과 귀히 여기는 마음을 이입(移入)시키는 법식(法式)이 있다. 오랜 전통으로 전해오는 이 법식을 불복장의식(佛腹藏儀式)이라고 한다. 사람의 뱃속에 오장육부가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듯 불상의 뱃속에 오장육부를 넣어 생명(가르침)이 숨 쉬게 하는 과정이다. 불상을 조성하고 복장의식을 하는 의의를 <조상경(造像經)>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직 절대 영지(靈地)인 마음과 법신향상(法身向上)의 이치 외에는 천하에 사(事)를 버리고 홀로 존재하는 이(理)나 이를 버리고 스스로 이루는 사가 어찌 있겠는가? 대개 불상을 시설하는 법이 사에 지나치게 가까운 듯도 하나, 그 가운데는 스스로 이가 있어 사문(事門)에 두루 하고 사는 이문(理門)에 두루 하는 것이다. 선현(先賢)은 이 복장(服藏)하는 물건을 보고 혹 후세 사람들이 사에 집착하여 이를 잃을까 염려하여 먼저 이치를 잡아 해석하고 다음 사의 한계를 들어 이와 사가 걸림 없는 도리를 밝혔다.”
복장의식은 비밀리에 행해져 왔다. 불상을 모시고 점안식 전날 쯤 사찰의 스님들과 복장의식을 집전하는 스님들이 모여 비공개적으로 행해 왔다. 불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 신성한 의식이기에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관례다.
10월 23일 오후 2시 전남 담양문화회관에서 우리나라 전통불복장의식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시연된다. ‘G20개최 성공 및 남북통일 세계평화 기원 불복장시연회’를 준비하고 있는 수진(守眞)스님은 불복장의식을 정통(正統)으로 전수받아 많은 사찰에서 불복장의식을 집전해 왔다.
“불복장은 여러 측면에서 그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불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몸속에 오장육부가 있는 것처럼 불상의 복장은 오장육부를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100가지가 넘게 이입되는 복장물은 모두가 진리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오곡(五穀)은 지혜의 종자를 기른다는 의미가 있고 오보(五寶)는 영원불변한 진리의 상징입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의미도 큽니다.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의 40% 이상이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복장 유물은 불상이 조성될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함께 역사학 민속학 미술사 서지학 인쇄문화사 복식 직물 등 다방면에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공합니다. 불복장물은 그 조성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심과 구도심,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아이콘들이기도 한 겁니다. 일종의 타입캡슐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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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을 조성하는데 있어 첫 단계는 어떤 불상(보살상)을 어떤 형태로 무엇을 소재로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조성된 불상에 복장물을 이입함으로 그 생명과 신성(神性)을 담는다. 이렇게 완성된 형상이 생명을 갖추고 중생들에게 자비와 진리를 베풀어 주시는 불상이 되어 눈을 뜨게 된다. 불상의 눈을 뜨게 하는 의식을 점안의식이라 한다.
수진 스님은 불상에 생명을 넣어 ‘나무토막’에서 ‘부처님’이 되게 하는 과정이 불복장의식이란 점에서 그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불상의 조성 기원은 부처님 당대로까지 올라갑니다. 불복장의 기원도 부처님 입멸 후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데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부처님의 사리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진귀한 상징물을 넣어 불상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모실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중국의 음양오행설은 우리의 장기를 금목수화토 오행에 맞추어 간장 심장 폐장 신장 위장의 오장으로 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추어 다섯 방위를 의미하는 오방색의 오보병에 각 13가지의 보물을 넣습니다. 이를 방위와 색을 맞추어 후령통(喉鈴筒)에 넣는데 이때 오보병 안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물목들이 들어가고 그 내역서도 함께 봉안합니다. 후령통의 아래쪽은 넓은 원통이지만 위쪽이 목구멍처럼 가는 통으로 이뤄졌는데 이곳으로 영기(靈氣)가 발산되는 겁니다. 이 외에도 복장에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물건들이 들어가는데 사경이나 의류 서적들이 일반적입니다. 불복장 자체가 불상을 법신이 되게 하는 겁니다.”
불복장 의식은 간단하지 않다. 경건한 분위기와 여법한 준비, 도량의 청정성 등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티벳에서는 그 나라 방식대로 불복장 의식을 행하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사라졌습니다. 중국의 일체장경이나 일본의 신수대장경, 속장경 등에 <조상경>이나 불복장 관련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만은 <조상경>이 전해지고 모든 불상에 복장물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불상 조성에 대한 법식이 바르게 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서탑에서 부처님 사리와 장엄구가 무수히 나왔고 766년에 조성된 지리산 석남사 석조비로자나 불상의 대좌에 사리장치를 넣었던 흔적이 있는 등 그 역사적 연원도 매우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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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삼국시대부터 전통을 형성 해 온 불복장의식은 조선시대 용허 화악 스님 등에 의해 정리되어 조선후기 호남지방에서 활약한 고승 연담유일(1720~1799) 선사로 이어지고 다시 화담법인(1848~1902) 스님으로 전해졌다. 금해관영(1856~1926) 스님이 화담법인 스님으로부터 전수 받아 묵담성우(1896~1981) 스님에게 전했다. 묵담성우 스님은 다시 도월수진 스님에게로 그 면면한 법식을 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진 스님은 20여 년 묵담 스님을 시봉하며 직접 불복장의식을 전수 받았다. 무엇보다 의식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복장진언>이란 서적이 선가(禪家)의 ‘의발(衣鉢)’처럼 전해지고 있다. <복장진언>은 <조상경>을 저본으로 지은 복장의식 관련 일체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조상경>은 전남 담양의 용천사본의 대장일람경(1575), 전남 고흥 능가사본의 관상의궤(1677), 평안도 용강 화장사본의 화엄조상(1720), 경북 상주 김용사본(1746), 금강산 유점사본(1824), 간기가 없는 필사본 등 6본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유점사본을 중심으로 한 <복장진언>은 금해관영 선사가 1911년에 지은 것으로 묵담 스님을 거쳐 수진 스님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옛 스승들의 말씀에 ‘있는 법 없애지 말고 없는 법 만들지 말라’는 명구가 있습니다. 노스님(묵담 스님)을 모시면서도 가끔 이 말씀을 듣곤 했습니다. 이미 있어서 전해지는 법은 반드시 그 가치가 있으므로 없애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없던 법을 새로 만드는 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만들어서 혼잡스럽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는 법을 잘 지키지도 못하면서 없는 법을 자꾸 만들어서 분쟁과 갈등을 심화 시키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세상의 일은 어떤지 몰라도 불법문중에서는 있는 법을 잘 지키려는 노력이 더 절실하다고 봅니다. 불복장의식만해도 그렇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의궤에 따라 여법하게 봉행될 때 그 가치가 제대로 유지되고 전승될 것입니다.”
수진 스님은 율사로서 청정한 수행으로 귀감이 되었던 묵담 스님을 시봉하면서 직접 배운 의식과 <복장진언>을 바탕으로 계율에 어긋나지 않게 불복장의식을 집전한다. 스님은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과 청도 운문사를 비롯해 서울의 영화사, 구룡사, 공주 성곡사, 일본 큐슈의 대법화사, 브라질 상파울로 길상사 등 30여 사찰의 불복장 의식을 집전했다.
불복장의식 역사 문화적 가치 ‘무형문화재’로 충분
10월 23일 담양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개 시연 계획
이제 스님은 이 전통을 제대로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스님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불복장의식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종교적 가치를 넘어 역사 문화 예술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불복장물과 그 의식은 현재의 생활문화상을 후세에 전하는 은밀하고 정확한 방법이다. 거기에 역사적 전통과 그 전승의 계보가 확실하므로 영산재와 같은 ‘전통작법’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스님의 이 같은 의지를 뒷밭침하기 위해 용화사 신도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불교 전통불복장의식보존회’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보존회는 <한국불교 전통 복장물 조성 절차>라는 책에 불복장의식의 전모를 담아내기도 했다.
“스승님들이 가르치신 대로 있는 법을 제대로 지키는데 몰두해 왔습니다. 이제 이 법을 전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수진 스님은 불복장의식이 무형문화재로 등록되고 용화사에 전승관이 설립되면 불복장의식이라는 콘텐츠가 더욱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날마다 복장의식을 치르면서 산다. 그것도 하루 세 번씩. 우리가 뱃속을 채우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 말이다. 하루 세끼 밥 먹는 일이 중생이라는 이름의 부처를 상대로 복장의식을 행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매순간 부처를 살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수진 스님은 용화사에서 동자승 16명과 함께 지낸다. ‘좋은 인연’을 따라 와 용화사 동자각(童子閣)에서 살고 있는 동자승들은 철부지들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조석 예불을 모시고 바라춤을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 수진 스님에게는 그들 또한 부처님이고 그들의 입으로 밥알이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경건하고 소중한 복장의식이다.
수진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뭐 쓰실 것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는 법 제대로 지키다가 잘 전해주는 것이 내 몫인데 그마저 부족한 게 많으니 말입니다. 어지간하면 기사 안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수진 스님은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덕봉지광(德峰智光) 선사를 은법사로 득도. 묵담성우 대종사로부터 사미, 비구, 보살계 수계.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해인사, 통도사 극락암, 서울 상도동 백운암 등에서 안거정진. 해동율맥 제 9대 율사인 묵담 대종사로부터 예수재, 수륙재, 가사불사, 비구계 보살계 수계작법, 불복장의식, 점안작법 등 직접 전수받음. 담양사암연합회 회장 등 지역불교를 위한 다양한 활동전개. 대한불교원효종 종정을 지낸 법홍(法弘) 스님으로부터 해동율맥을 전수받은 제11대율사. ‘묵담대종사문집 및 법문 테잎’ 발간. 인도기행문 <부처님 자취를 찾아서>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