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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산 깊은 골에 자리 잡은 각화사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소나무와 굴참나무들이 울울창창하여 빛살이 쉬이 내려앉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늘져 있다. 이런 곳에 절이 있기나 할런지 의구심을 품고 몇 구비를 돌고 돌았다. 저 멀리 단청을 입힌 당우가 얼핏 눈을 스친다.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골이 깊어서 바람과 구름이나 쉬었다 가는 이곳에 바랑을 내려놓은 스님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아마도 견성하고야 말겠다는 분심 하나로 이곳에 터를 잡았을 것만 같다.
각화사에 들어서면 바깥소식은 귓등 밖 소식으로 들릴 것 같다. 혜담 스님의 거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먼저 자리를 차고앉은 푸른 소나무와 구름과 산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이 부질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풍광은 더욱 선명해 보였다. 산 너머의 산 그리고 또 산 너머의 산이 겹겹이 두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 너머의 그 곳에 가 닿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혜담 스님은 선방 수좌이면서 학문연구에도 열정을 바친 분이다. 불광법회를 만들고 불자들의 문사수(聞思修)교육에 열과 성을 바친 은사 광덕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다. 스승의 사상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하반야바라밀’을 이어받았다. 스승은 영민한 혜담 스님을 상좌로 도반으로 생각하였고 많이 아꼈다. 광덕 스님은 반야바라밀을 “일체 허망을 깨뜨리고 진실만이 온전히 드러난 궁극적 진실이며, 영원히 변치않는 궁극적 실체이며, 실상생명”이라 했다. 혜담 스님은 ‘마하반야바라밀’ 연구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경상 앞에서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다. 그 공부를 이어 방대한 <대품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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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의 연이라면 초등학교 6학년 때 도덕교과서에 실린 설산동자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사람은 나도 언젠가는 죽고 꽃은 피어도 곧 진다/ 이것은 생명 있는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께 묻고 싶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이 틀림없이 모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문구를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출가를 하고 보니 그 이야기가 나와 있더란다. 스님은 전생에 아뢰야식 속에 남아있던 그것이 큰 의문으로 작용한 것이라 여겼다.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었고, 그때 불교신문도 받아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대로 출가해버렸다. 출가하고 보니 속가에서의 이런저런 인연들이 출가를 위한 디딤돌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다음 날 걸망을 매고 칠불암 선방으로 갔다. 졸업식하고 바로 그 다음 날 바람같이 쌩 하고 칠불암을 찾았으니 선수행에 대해 얼마나 목말라했는지 알 수 있다. 화두를 참구한지 사십여 년이 되니 구멍 난 좌복을 몇 개나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마하반야바라밀’ 그 자리를 보는데 출가하고 40년이 걸렸다면서 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뒤돌아보는 것으로 법문을 열었다.
“수좌들 중에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화두로 들고 있는 이들이 많아요. <무문관> 제 1칙에 이미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에 대해 ‘있다 없다’를 떠난 세계라고 답을 해놓았어요. 화두는 의심인데, 이미 알고 있는 화두를 잡고 있으니 공부가 되는지 의심스러워요.”
화두란 의심이다. 온 몸이 전체로 그 문제와 하나가 되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가 의심이다. 의심이란 간절하게 생겨야 하는 것인데 억지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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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거침없는 말씀은 오랜 세월 치열하게 자신의 공부를 챙기고 점검한 데서 나온 것이기에 진실하다. 좌복에 구멍이 나도록 수십 년 간 화두를 참구하다가 그만 뇌혈관이 터져버린 일이 있었다. 이태 전의 일이다. 선객이 화두가 터져야 할 일인데 뇌혈관이 터져버렸으니 암담하고 난감한 것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을 관하기 위해 머리를 너무 혹사시켜버렸으니 자신의 공부에 문제점이 있음을 절감한 사건이기도 하다.
본래가 공이고 ‘마하반야바라밀’인데, 머리는 어디에 있으며 터질 머리는 또 어디 있는가? 자신의 공부를 돌이켜보았다. 광덕 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 법문을 다시 들어보았다. 출가하고서부터 공을 깨닫기 위해 화두에 매달렸을 뿐, 기도에 대해 그다지 달갑지 않게 생각해 온 터이다. 그런데 “불자의 수행은 기도와 함께 시작된다”는 은사 스님의 그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광덕 스님의 법문 중 ‘마하반야바라밀’에 관한 법문만을 뽑아서 <행복을 창조하는 기도>라는 책을 내었다.
“마하반야바라밀에 관한 법문을 책으로 엮는 5~6개월 동안 ‘마하반야바라밀’ 화두가 절로 들리더니, 어느 날 마하반야바라밀 그 자리가 보이데요. 조사스님들이 ‘견성하라’고 ‘마음을 보아라’고 왜 그렇게 절실하게 당부했는지도 알겠더군요.”
마음자리를 보았더니 허공처럼 생겼더란다. 허공은 지구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듯이 우리 마음도 지구 이전부터 있었다. 허공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다. 허공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는 절대청정이며, 원만구족하여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즉 내 마음이 본래 허공과 같기에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허공과도 같은 내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내어 쓰면’ 된단다.
스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해하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의 내 마음을 보셨는지 갑자기 질문이 날아왔다.
“불생불멸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생기는데 왜 생기지 않는 것이며 멸하는데 왜 멸하지 않는가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예, ‘에너지 보존의 법칙’ 혹은 ‘질량불변의 법칙’을 떠올리면 불생불멸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혜담 스님은 나의 대답에 긍정도 부정도 아니 하시고 전깃불을 예로 들어 법문을 이어갔다.
“음극과 양극이 합해져서 불이 켜지잖아요. 전등불은 1초에 60번 깜빡거리는데도 우리 눈에는 필름이 돌아가듯이 계속 연결되는 것으로 보여요. 말하자면 1/60초 동안에 전극이 붙어있다가 1/60초 동안에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전깃불이 켜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속적으로 붙어있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지요. 전기가 없는 1/60초 그 순간에 무엇이 있는가?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하여 그 사이에 없는 그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이 있는 그 순간’을 알아야 합니다. 있는 순간에도 있고, 없는 순간에도 있는 것이 부처입니다.”
범부들은 있다는 세계와 없다는 세계만을 인식하는데, ‘있다 없다’를 초월한 그 세계가 있음을 믿어야 한단다. ‘없는 것이 있는’ 그 순간이 공(空)인데, 그것을 보아낼 줄 알아야 한단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없다고 하지만 죽으면 살아있는 것이 없어진 것이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도장에 비유한다면 살아있는 것은 양각이요, 죽어 있는 것은 음각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는 것이며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불이(不二)의 관계를 기억해야 할 일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무한정으로 내어 쓸 수 있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여쭈었다. 그때 새 한 마리가 창공을 거침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스님은 새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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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성경에 ‘저 하늘을 보아라. 저 새 들이 언제 먹는 것을 걱정하더냐, 하늘의 새가 잠자리를 달라고 하던가. 그런데 여호와가 다 준다’는 대목이 있어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바꾸면 ‘저 하늘을 보아라. 저 새들이 언제 먹는 것을 걱정하더냐, 하늘의 새가 잠자리를 달라고 하던가. 그런데 이미 다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가 되겠지요. 이 말은 태어날 때 내가 불성을 다 가지고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갖추어진 불성을 그대로 내어 쓰면 돈이 생기게 되어 있고 밥이 생기게 되어있고 건강이 생기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새는 가만히 있지 않고 본성에 따라 먹이를 찾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가을이면 남대천에 연어가 올라오는데 이때 수많은 새들이 본성적으로 알고 몰려옵니다. 우리도 본성을 보면 본성자리에 서게 됩니다. 본성자리에 서면 본능적으로 돈이 있는 곳을 알고 명예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광덕 스님의 이 법문은 이론적으로 완벽합니다. 잘 살고 싶어도 부처님께 기도해야 하고, 저쪽 세계를 보고 싶어도 부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내어 쓴다’는 깊은 뜻을 알고 싶었는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오히려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다. 스님은 한때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렸다는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으셨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 책은 불교의 ‘일체유심조’를 차용하여 일반인들이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놓았어요. 그런데 광덕 스님께서 설한 마하반야바라밀 법문도 이와 똑같은 것이네”라고 했다.
시대가 물신(物神)주의이다 보니 종교가 물신교가 되고 기도가 점점 더 기복화 되어가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기도를 통하여 바깥에서 무언가를 구하려는 기도는 불교적인 기도가 아니란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내어 쓸 줄’ 아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란다. 기도에 대한 개념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침에 <금강경>을 한 편 읽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부처님 속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공덕을 내어 쓸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요. 관세음보살기도를 할 때 우리 불자들은 자연적으로 관세음보살이 ‘나를 낫게 해줄 것이고 나에게 열쇠를 줄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고 있는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젠 기도의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관세음보살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입니다. 나를 ‘관세음보살’ 화(化)해야 하고 내 안에 관세음보살이 지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 그것을 ‘내어 쓴다’는 믿음이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100% 믿는다면, 새가 먹이를 찾아가듯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저절로 가게 되어있어요.”
임제 스님이 ‘수승한 것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승함이 온다’고 했듯이 불성자리를 익히게 되면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저절로 오게 되어있단다. 기도란 ‘내 생명 속에 넘쳐흐르는 진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 온전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산을 올라갔으니 내려와야 한다. 옷자락에 묻혀올 것 같은 안개도 그 자리에 두고, 마주했던 소나무도 그 자리에 두고, 휘장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산도 그 자리에 두고 산문을 나섰다.
혜담 스님 약력
1949년 울산 출생.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득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 해군군종법사 대위로 전역.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수료. 선우도량 공동대표,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과 재심호계위원 역임. 지금은 검단산 각화사 주지이며 재단법회 대각회 이사. 역저서로는 <반야경의 신앙> <반야불교 신행론> <대품 마하반야바라밀경> <방거사어록강설>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행복을 창조하는 기도> 등 다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