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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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법왕사 회주 문인 스님
부처님법 만난 건 전생의 인연덕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계곡에는 물소리가 흘러넘쳤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올라간 홍송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소년의 눈에는 아름드리 큰 홍송들이 울창하게 들어 선 이곳이 낯설지 않았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에 들어서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언젠가 와 본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출가의 길이 될 줄은 몰랐지만, 소년은 해인사에서 한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소년은 산골 동네의 훈장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명심보감>부터 해서 <논어> <맹자>를 배웠다. 누군가가 해인사에 가면 한학을 좀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 한 마디가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은 한학을 배워보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나와 해인사 백련암으로 갔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학을 배우기 위해서 갔다지만 전생에 이미 해인사에 이런저런 인연들을 심어놓았기에 인연 따라 찾아갔던 것’이라 한다. 정도원 스님을 은사로 불조의 제자가 된 것이며, 당신의 초발심을 야물려 준 여러 어른 스님을 만난 것을 두고 전생의 연이라 생각한다. 또 당대 최고의 강백인 운허 스님 문하에서 사집(四集)과 대교과를 익힌 것을 두고 다 전생의 복으로 돌린다. 절집에 몸을 맡긴 세월이 육십여 년, 그동안 강산이 여섯 번 바뀌었지만 출가의 길에 들어선 지가 어저께 같다면서 문인 스님은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덧없는 것’이라 했다.

세방골에 위치한 법왕사에 들어서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상이 먼저 반긴다. 사자후를 내뿜기라도 하는 듯 큰 입을 벌린 채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자상. 세세생생 불교를 수호하겠으며,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지켜내겠다는 강건한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다.

문인 스님의 방은 소박하고 조촐하다. 수십 년은 족히 될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벽 한쪽에 낮게 매어 단 책꽂이가 세간의 전부였다. 세납 칠십이 넘은 스님은 몇 해 전부터 머리에서 소리가 나는 병을 앓고 있다. 이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걱정이 앞서는 마음에 ‘왜 보청기를 끼지 않느냐’고 여쭈었다. 스님은 보청기가 소리에 대한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면서 나이가 들면 ‘조금 적게 듣고 조금 적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라 답했다.


스님은 <능엄경>의 한 구절을 들려준다.
“아난아, 이 기타 숲의 절에서 공양시간이 되면 북을 치고, 대중이 모이는 시간에는 종을 친다. 종소리, 북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소리가 귀에 오는 것이냐 귀가 소리 나는데 가는 것이냐?
만일 소리가 오지도 않고 귀가 가지도 않는다면 소리를 듣지 못하여야 하는 것, 그러므로 듣는 것이나 소리가 모두 처(處)가 없어서 들음의 처(處)와 소리의 처(處)가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요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귀는 있으되 소리는 들을 수 없는 것, 또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눈은 있으되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소리도 색도 허망한 것이다. 중생들의 삶이란 육근(六根)-눈, 코, 귀, 혀, 몸, 마음-에 의지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쫓아다니는 허망한 삶이 아닌가. 문인 스님은 색과 소리와 향기와 맛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마음과 몸을 분주하게, 곤궁하게 할 뿐이지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은사이신 정도원 스님은 계율에 철저하였다. 심지어 ‘뒷간 갈 때 사용했던 손전등을 법당 갈 때는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한 번은 뒷간에 갈 때 들었던 손전등을 법당에 들고 가다 은사스님과 마주쳤다. 은사스님은 그 자리에서 은박으로 덮인 렌즈를 닦으라고 일렀다. 은박으로 덮인 렌즈를 닦아버리니 불빛이 희미해져 버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계율에 관해서 엄하신 은사스님의 가르침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밑바탕이 되었을 뿐더러 고비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석우 스님으로부터 조주 ‘무(無)자’화두를 받고 좌복 위에서 화두의 꽃을 피워보겠다고 무던히 애를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해는 좌복 위에서의 공부를 걷고 다른 이가 공부를 지어나갈 수 있도록 외호하는 것도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인 스님은 해인사 선방에서 공양주 노릇을 하였다. 낮에는 공양간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능엄경>을 배우는 등 참으로 신심 나게 살았던 때라고 한다. 그때 하심(下心) 제일이라는 지월 스님을 만났다.
지월 스님은 선방에서 입승소임을 맡았고, 그러다 유나소임을 보았다. 지월 스님은 누더기 입고 주장자 하나 들고 말없이 해인사를 20년 동안 지켜낸 분이다. 지월 스님은 한없이 겸손하여 ‘나’라는 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산부처’처럼 느껴졌단다.

한번은 해인사 도량에 독감이 만연하여 온 대중이 감기에 시달렸다. 그래서 대중들은 명태를 사다가 저 산 아래 냇가에 가서 솥을 걸고 명태국을 끓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지월 스님은 명태국을 끊이는 곳으로 갔다.
“보살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가?”“예 고뿔약을 끓이고 있습니다.”
지월 스님은 “에이, 고뿔약 냄새 참 고약타” 이 말씀 한 마디 뿐 꾸중도 뭣도 없었다. 지월 스님은 스님들을 부를 때 항상 ‘보살’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이것 또한 하심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걸망을 지고 산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양손을 벌려 막아서면서 “이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두고 어디로 가려는가”하고 말렸다.


지월 스님은 아무런 상 없이 대중들을 보살폈고, 하심과 인욕으로 모든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눅였다고 한다. 육조 스님이 “남의 허물이 곧 자신의 허물이라”고 했듯이 지월 스님은 남의 허물을 자신의 잘못인양 마음 아파하고 허물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들판의 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한 장의 나뭇잎이 빨갛게 물드는데도 하늘과 바람과 계절의 말없는 동조가 필요한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 허물을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드는데도 세상 전체의 숨은 뜻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니 남의 허물이 곧 나의 허물이 되는 것이다.

문인 스님은 부석사와 봉정사 주지소임을 맡아 가람을 수호하는데 이십여 년을 바쳤다.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봉정사의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된 고대의 건축물이기에 무엇보다도 잘 보존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을 날마다 볼 수 있음은 호사 중의 호사란다. 아침에 눈 뜨면 당우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일과 중 하나로 삼았다.

봉정사는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달마야 놀자’ ‘동승’의 촬영지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다. 또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한 곳으로 한 때 세계 언론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문인 스님은 봉정사에 머물면서 많은 불사를 하였다. 극락전이 쓰러질 위기에 처해져 있어 해체보수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이 봉정사 불사의 시작이었다. 일반인들은 문화재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해 마뜩찮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보수를 해주어야 한단다. 봉정사는 고대 건축물이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매우 많았다. 고건축물의 수리공사란 ‘원형복원과 수리공사를 동시에 행하는 작업’이라는 문인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고건축에 대한 스님의 깊은 안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여왕이 방문했던 그때의 분위기를 알고 싶다고 했더니 “뭐 말이 통하나, 그냥 얼굴만 봤지”라고 하신다. 문인 스님은 소문대로 지극히 말씀을 아끼시는 분이다. 봉정사를 방문한 여왕은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고 썼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문인 스님은 평소에 아끼는 문구인 ‘일념만년거(一念萬年去)’를 담은 족자를 선물했다. 일념만년거(一念萬年去)에는 ‘좋은 한 생각이 만년을 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찰나의 한 생각도 우리 마음 안에서 생겼다 꺼지는 것이지만 그 생각의 자취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마음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스님이 즐겨 보는 경전을 여쭈었더니 “경전에 차별 두는 마음은 없으나 그래도 <금강경>을 꼽을 수 있지”라고 답하신다. <금강경> ‘제 6 정신희유분’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이 아닌 것도 취하지 마라.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내 설법을 뗏목과 같음을 알라’고 하노니, 법도 오히려 응당 버려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을 취하겠는가?”
시고 불응치법 불응취비법 여래상설 여등비구(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如來常說 汝等比丘)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부처님은 ‘당신이 설한 법은 뗏목과 같으니 강을 건넜으면 미련 없이 뗏목을 버리라’고 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같은데 정법이 아닌 것을 따르거나 취할 이유는 없지요.”
정법을 배우고 몸에 지니기도 바쁜 세상에 바른 법이 아닌 것을 뒤좇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스님의 경책 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법(法)과 비법(非法)의 구별이 점차 모호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비법이 횡행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지혜롭지 아니하면 비법을 정법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이에 대해, 문인 스님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오계(五戒)에서 벗어나는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해 보면 된단다. 스님은 세상에서 무서운 것 중 하나가 ‘사람의 욕심’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아요. 부처님께서 모든 특권이 보장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시면서 이미 물질에 대한 집착이 헛된 것임을 가르쳐 주었잖아요.”
낮게 엎드린 앉은뱅이책상이 소탈한 스님의 성품이며 소박한 삶을 살아온 스님의 내력을 훤하게 말해주고 있다.
건들바람이 처마에 매달린 풍경을 울리고 간다. 풍경은 참지 못하고 그만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낸다. 풍경소리가 귀로 온 것인지, 귀가 소리 나는 데로 간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문인 스님 약력
해인사 백련암에서 정도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해인사강원 대교과 졸업. 고운사, 부석사, 봉정사 주지 역임. 조계종 총무부장, 중앙종회부의장, 종교인연합회부회장 역임. 지금은 대구 세방골에 위치한 법왕사에 주석하고 있다.

글ㆍ사진=문윤정 수필가ㆍ본지객원기자 |
2010-11-09 오후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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