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 신행 > 법문·교리
[선지식을 찾아서]-대선 스님(요덕사 회주)
10ㆍ27법난, 새로이 발심하는 계기로 삼아야

칠월의 햇살은 거칠고 뜨겁다. 강한 햇살과 지기(地氣)를 흠뻑 받아들인 나무들의 짙푸른 잎들이 바람에 사운거린다.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녹색 그늘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깊은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는 두견새와 숨넘어가듯 급박하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한 여름 숲의 정적을 깨뜨린다. 요덕사를 가기 위해서는 아래 절인 홍련암을 거쳐야 한다. 홍련암은 연꽃으로 화장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활짝 핀 연꽃 위로 내려앉는 햇빛은 기품 있고 고결해 보인다.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연꽃의 향기는 홍련암을 채우고도 남는다. 홍련암은 대선 스님이 연로하신 어머니를 위하여 생가를 절로 만든 사연을 안고 있다. 연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연못을 만들고 그곳에 홍련을 심었다. 이제 홍련암의 연꽃은 사진애호가들이 몰려드는 완주의 명물이 되었다.

대선 스님을 꼭 이태 만에 뵙는다. 스님은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사는 이를 뭐하러 또 찾아왔느냐고 퉁을 놓는다.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스님의 말씀은 이러하지만, 공부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든다. 스님의 푸른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도인의 경계는 ‘불이 얼음을 녹이면 다시는 얼음이 되지 않으며, 화살이 이미 시위를 떠나면 돌아올 기세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대선 스님이 똑 그러하다.
스님은 어렵게 공부했던 봉암사시절을 떠올렸다. 좁은 선방에 스무 명이 앉으면 서로 무릎이 닿을 정도인데도 사부대중을 받았다. 비구가 한 7~8명 정도 되었고,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가 한 곳에 모여 공부를 했던 시절이었다. 환경은 그리했지만 그곳에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이 계셨기에 공부에 대한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요즈음은 옛날에 비해 선방도 많고 수좌들도 더 많은데 왜 공부인이 나오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해요. 공부인이 나오지 않으면 오합지졸이지, 뭐하겠어요? 밥만 축내는 것이지. 옛날 노스님들이 우리들 보고 ‘너희들 공부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인가?’하는 이야기를 간혹 들었어요. 욕심인지는 몰라도 오십대쯤 되는 수좌들을 보면 노스님들처럼 ‘너희들 공부하는 것 보면 죽도 밥도 아닌 것 같다’고 질타를 하고 싶어져요.”
대선 스님은 도봉산 망월사에서 천일을 세 번이나 보탠 삼천 일간이나 솔잎, 쌀가루, 콩가루만을 먹으면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했다. 갑사의 북사자암에서는 한 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은 방에서 사년간 수행을 하여 병을 얻기도 했다. 스님은 수행은 그렇게 하는 줄 알고 평생을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정진했다. 수좌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스님의 수행담이 회자되고 있다.
대선 스님은 그 시절이 그리운지 향곡과 성철스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향곡 스님은 남방도인이었어요. 향곡 스님 회상에서 살 때 그 분을 척 바라보기만 해도 ‘공부를 안 하면 저 양반이 나를 죽이지’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형형했지. 체구도 크고 화탕하고 걸탕진 것이 매력이야. 선방수좌들이 이끌릴만한 모습을 타고 난 참으로 멋이 있는 도인이었어요. 성철 스님은 말쑥하니 잘 생긴 것이 천재의 모습이었어. 눈빛이 살아있으면서 학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봉암사시절 두 사람은 한산과 습득처럼 짝이 되어 십 수 년을 같이 공부하고 법거량을 나누었다. 지금은 그러한 도인들이 귀한 시절이고 설령 지도자가 있고 좋은 도량이 있다 하더라도 원초적으로 요즈음 사람들의 근기가 약해서 공부인이 나오기가 힘들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이다.


“옛사람이라고 다 근기가 강하고 요즈음 사람들이라고 허약한 근기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우주의 기를 받고 어머니, 아버지의 기운을 받는 것이 소우주인 우리의 몸입니다. 어머니 품속에서 나와서 모유를 먹여야 하는데 요즈음은 다들 소젖을 먹이잖아요. 모유는 최고의 약성(藥性)이 함유되어 있으며, 시간에 따라서 아기의 몸에 맞게 맞추어지는 최고의 영양식인데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현대인들이라. 어머니의 품과 모유는 대근기를 마련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참 안타깝지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는 좀 알아야 해요.
요즈음 행자들이나 사미승들은 다들 집에서 귀하게 자라서인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좋은 것만 먹으려 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선호한다고 그러데요. 그래서는 도인이 나오지 않아요. 구식으로 돌아가야 도인이 나오지 현대 신식으로 해서는 도인이 나오지 않아요.”

대선 스님이 공부하던 시절은 나라가 가난하고 절집이 가난하여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누더기 옷 한 벌이면 족했고, 멀건 죽 한 그릇 먹고도 깨닫고야 말겠다는 분심과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돈만 가지면 산호랑이 눈썹도 빼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니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승가는 세속과는 달라야 해요. 옛날에는 좌복이 이불이 되고 그것 하나로 견디면서 공부했어. 옛날에 노스님 아래에서 아프다고 하면 다른데 가서 알아보라 하고는 당장 쫓아냈어. 그러니 아프다는 소리 할 수도 없고 그저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했어요. 그것이 공부인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거지. 빈도(貧道)로서 일종식하고 금식하고 탁발하고 그랬어. 기한이 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고 춥고 배고플 때 도를 구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여. 지금이라도 종단이 살아나려면 가난을 자초하여 좀더 가난하게 살아야 해. 옛날의 중들은 그런 정신이 살아있어선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어도 그 면모가 풋풋하고 때깔이 났어요.”

스님은 말미에 전두환 대통령 때 일어난 ‘10ㆍ27법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때 우리가 새로이 발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일’이라 했다.
“10ㆍ27법난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불교근대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곳에도 전화가 왔고, 홍련암보다 더 못한 움막집을 짓고 사는데도 군관민 합동으로 해서 쳐들어왔다더군. 전국의 사찰들이 그놈들의 군홧발에 짓밟혔을 때 월명암의 월인 스님 한 사람만이 큰소리쳤어. 군인들이 신발신고 법당에 올라오는 것 보고 ‘이놈들! 어디 감히 부처님도량을 짓밟는가?’ 하고 호통을 쳤더니 그 모습이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여 그냥 갔다고 하더군.
요즈음 ‘10ㆍ27 법난’ 과거규명 한다고 야단들인데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야. 나는 잘했는데 저쪽이 잘못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출가발심으로 돌아가 산속에 들어가서 공부했어야지. 그렇게 했다면 종단의 위상이 지금보다는 훨씬 올라갔을 것이야.”


스님의 말씀은 거침없다. ‘예전에는 공부가 좀 시원찮다 싶으면 장군죽비로 죽어라고 막 때렸지’라고 덧붙였다. ‘그때는 공부하다가 죽으면 영광으로 생각할 때’였기에 맞는 이나 때리는 이나 공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요즈음의 선방분위기는 예전과 달라서 그렇게 때렸다가는 소송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라면서 씁쓸해 했다.
“내가 얼마 전에 어디 가서 장군죽비를 휘둘렀는데, 한 대 때렸는데 앞으로 꼬꾸라지는 거야. 옛날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인데, 혹시 죽었나 하고 겁부터 나데요. 그만큼 서로가 믿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지.
향곡 스님은 장군죽비를 직접 만들었는데, 한 번 맞으면 맛이 나게 무직하게 만들었어요. 향곡 스님은 몸집이 커서 장군죽비로 내리치면 덩치 좋은 사람도 앞으로 푹 꼬꾸라져요. 장군죽비로 죽을 정도로 맞아도 깨닫고야 말겠다는 분심에 비하면 아픈 것도 아니었지.”


공부안하고 그렁저렁 살다가 죽는 것은 평생 ‘송장 하나 지키다’가 가는 것임을 명심하란다. 젊었을 때는 바쁘게 살다보니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가 늙어서 이제 공부해야겠다 싶어 보면 그때는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앉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이 중생들의 살림살이다.
“요즈음 내가 한탄하는 것이 건강입니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데 전에만 못해요. 춘성스님은 팔십이 되었는데도 새벽 3시면 당신이 직접 새벽에 1시간씩 목탁을 쳤어요. 그때 도봉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탁치고 염불했는데, 마치 사자가 ‘으흥으흥’ 하는 것 같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옛날에는 지도급에 있는 스님, 수행력이 있는 스님들이 먼저 첫새벽에 일어나 목탁을 침으로서 기상나팔이 되었고 모든 공부가 그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부처님의 출가 목적이 ‘생로병사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되었듯이, 우리에게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임에 틀림없다. 대선 스님이 현대인들을 진단했을 때 ‘생로병사만큼 다급하고 급한 일이 없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발심을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 앞에서 복 달라고 조르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란다.

“죽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아서, 실제로 당해보지 못한 것이라 말로 들으면 실감이 안나요. 죽는 것이 아직 먼 것 같지요? 나부터도 그래요. 오십대에는 내가 이렇게 늙을 줄 몰랐지. 불가에는 백골관(白骨觀)이 있어요. 우리 중생은 잊어버리는 속성이 있으니 대들보에 해골 하나 달아놓고 공부한다면 무상(無常)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는 것은 힘 드는 일이니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육신이 영원할 것 같아 여기에 매달리고 집착하지만 그것이 바로 망상이요 헛된 꿈이다. 시간은 살같이 지나가니 공부를 뒤로 미루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옛날에는 법문 한 마디 듣기 힘들었어요. 요즈음 컴퓨터에도 텔레비전에도 천지가 법문으로 넘쳐나고 있어.”
‘법문이 없을 때 오히려 공부인이 나왔다’는 스님의 말씀 의미심장하다. 스님의 말을 빌자면 ‘남이 침 발라놓은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소용없는 것, 스스로가 실천수행하는 것만이 깨달음의 지름길로 가는 것이란다.
요덕사의 대밭이 참으로 좋다. 산책삼아 푸른 대밭으로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에서 도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대선 스님 약력
19세에 계룡산 갑사에서 만공 스님의 제자인 혜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 도봉산 망월사에서 10년 동안 춘성 스님 시봉, 해인사 성철 스님 회상에서 10년 동안 정진. 그 후에도 금오 스님, 향곡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 20여 년 전부터 생가에 홍련암을 지어 정진. 요덕사 정진원과 오도암 등의 선방을 지어 재가불자들을 지도.

글/사진=문윤정 (수필가, 본지논설위원) |
2010-10-25 오전 11:54: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5.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